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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7년 김대(金岱)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9+KSM-XF.1727.4717-20170630.03722570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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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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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김대, 조덕린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727
형태사항 크기: 35.7 X 45.6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양 주곡 한양조씨 옥천종택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727년 김대(金岱) 서간(書簡)
1727년 4월 2일, 예안 오천김대(金岱, 1665~1747)가 함경도 종성에서 귀양살이 하는 조덕린(趙德鄰, 1658∼1737)에게 보내는 답장 편지이다. 김대조덕린의 소식을 간절하게 기다렸으며, 3월에 편지를 전해 받았다. 화재가 발생했다는 소식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고, 조덕린이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는 위로가 된다고 했다. 곧 유배에서 풀려나면 청량산 유람을 다시 이어갈 수 있으니, 그때를 위해 건강을 잘 보존하길 바라는 마음도 함께 전했다.
1차 작성자 : 박세욱

상세정보

1727년 4월 2일, 金岱함경도 종성에서 귀양살이 하는 趙德鄰에게 보내는 편지
1727년 4월 2일, 예안 오천金岱(1665~1747)가 귀양살이 하는 趙德鄰(1658∼1737)의 안부를 묻고 곧 귀양에서 풀려나면 청량산 유람을 다시 이어가고, 그를 위해 건강을 잘 보존하며 지내길 기원하는 내용의 답장편지이다.
편지의 첫 부분은 유배 갈 당시의 조덕린의 모습과 벗들의 심정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조덕린이 벗들과 이별할 당시 벗들은 조덕린을 부여잡고 처연한 마음을 가누지 못했으나, 정작 유배를 떠나는 조덕린은 얼굴에 조금의 기미도 없이 흔연히 길에 올랐다. 이에 김대는 평소 기르신 바의 인품에 탄복했다고 하였다.
김대는 매번 "안부를 묻는 심부름꾼은 오지 않고"1)1) 두보, 「所思」에 나오는 시구. 라는 두보의 시구를 암송하며 조덕린의 소식을 기다렸는데, 그가 지난해 6월 초 1일 보낸 편지를 올해 3월 15일에 받아 급히 읽어보니, 세대를 걸러 면목을 마주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평소의 건강은 신이 돕고 있으니 수염과 모발은 이전보다 나을 것으로 생각되고, 하늘의 명을 알고 즐기는 것은 본디 군자의 일이나, 조덕린은 안분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 士友들의 마음에 족히 위로가 된다고 했다.
조덕린이 보낸 편지에는 화재 소식도 있었다. 김대는 "편지 속에 화재가 있었다는 탄식은 錢牧齋도 면할 수 없었고, 柳州의 축하도 가하지 않으며, 左氏의 조문 또한 과합니다."라는 언급으로 자신의 심정을 드러냈다. 이어 김대 집안의 "『二程全書』" 문제에 대해 "그것이 이루어지고 어그러지느냐의 운수는 참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탄식한들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 선비들의 필독서 가운데 하나였던 『이정전서』와 관련된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는 조덕린이 곧 유배에서 풀려날 것이니 그때까지 건강을 잘 보존하길 바라는 마음을 전하였다. "천도가 잘 돌아오고 이렇게 성명한 때를 맞아 형께서 어찌 오래 問鵩2)2) 문복(問鵩): 올빼미에게 묻는다는 의미로, 한(漢)나라 가의(賈誼)가 장사(長沙)에 좌천되어 갔을 때,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올빼미에게 비유하여 지은 「복조부(鵩鳥賦)」에서 뽑아낸 전고(典故)이다. 여기서는 가의가 1년 뒤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는 긍정적인 결말을 암시하면서 결국 귀양살이를 의미하고 있다. 하겠습니까? 결국에는 見蝎3)3) 견갈(見蝎): 전갈을 보다. 한유(韓愈)의 「문창 스님의 북유(北游)를 전송하며(送文暢師北游)」란 시구인 "지난번 경관(京官)이 될 수 있어, 조벽(照壁)에서 전갈을 보게 되니 기쁘네(昨來得京官, 照壁喜見蝎)"에서 나온 것이다. 한유는 806년 6월 남쪽인 강릉(江陵)에서 경도(京都)로 돌아오는데, 이 귀환을 남방에는 전갈이 없으므로 '전갈을 보다'는 표현으로 함축하였다. 하는 기쁨이 있을 것이니 청량산 유람을 다시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때를 위해 自愛하시어 이러한 친구들의 바람에 부합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다. 추록에는 臨淸閣 고성이씨의 사망 소식을 전하였다.
발급인 김대의 자는 士宗, 호는 洛隱, 본관은 光山이다. 첫 번째 부인은 재령이씨로, 李玄逸(1627∼1704)의 딸이다. 두 번째 부인은 밀양박씨 통덕랑 朴成采의 딸이다. 광산김씨 예안파의 고문서 가운데 김대의 고신이 7건 전한다. 그 가운데 1690년에는 通德郞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장인 吏曹 參判 이현일1690년 1월과 6월의 別加를 사위인 김대에게 代加한 것이다. 1745년 부호군에, 1747동지중추부사 등에 임명되면서 받은 고신도 전한다.
수취인 조덕린의 자는 宅仁, 호는 玉川, 본관은 한양이다. 1677년 사마시에 합격했고, 1691년 문과 급제한 이후 교리·사간 등을 역임했고, 1725弼善으로 당쟁의 폐해를 상소한 문장 속에 노론의 득세를 비난한 내용이 당쟁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하여 함경도 鐘城에 유배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자 풀려나 부응교에 등용된 이후 동부승지까지 올랐으나 1736년 서원의 濫設을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노론의 탄핵으로 이듬해 제주도에 귀양 가던 도중 강진에서 죽었다.
古典資料叢書 82-2 光山金氏 烏川古文書, 韓國精神文化硏究院
光山金氏禮安派譜, 대경출판사
1차 작성자 : 박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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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727년 김대(金岱) 서간(書簡)

蒼黃攀別之日。親舊莫不凄然。而窃
瞯 左右無幾微見於色。忻然就途。
平日所養。令人歎服。每誦杜工部欲
問平安無使來之句。去六月初一日書。
得見於今三月之望。忙手開緘。如對隔世面
目。仍想
素履神祐。髭髮勝昔。樂天知命。固君子
之事。而吾 兄安之。此足慰士友之心也。
書中回祿之歎。錢牧齋之所不免。柳州之
賀固不可。左氏之弔亦過矣。鄙家程書
成毁之數。誠如所諭。雖歎奈何。天道
好還。値此 明時。 兄豈久於問鵩。終
有見蝎之喜。淸凉之遊可復續矣。惟祝
爲時自愛。以副此中親友之望也。不宣。伏惟
兄照下。謹謝上狀。
臨淸主人。已作古人。
芝焚之歎。尙何言
哉。何言哉。
丁未四月初二日。弟 拜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