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3년 6월 9일, 玉川 趙德鄰이 안부를 주고받고, 喪을 치르느라 병이 들고 바빠서 상대측 喪制에 참석하지 못한 점을 알리기 위해 쓴 편지
1713년 6월 9일에 玉川 趙德鄰(1658~1737)이 안부를 주고받고, 喪을 치르느라 병이 들고 바빠서 상대측 喪制에 참석하지 못한 점을 알리기 위해 쓴 편지이다.
처음 상대의 慰狀을 받은 것을 감사해 하며, 그간 장례를 치르는 일에 바쁘고 병에 걸리는 등의 이유로 답장을 제때 보내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어서 상대측 여러분들의 안부를 묻고, 상대 맏형의 병이 호전되었다는 소식도 들었음을 알렸다. 그리고 상대에게 外除(탈상) 날이 가까워졌고, 한창 더운 시절이기에 건강에 유의하라고 당부하였다. 자신의 경우는 지난겨울부터 이번 봄여름을 거치며 喪變을 거듭 당해 우환에 시달리다 보니 병까지 생겼다고 했다. 그래서 상대측 喪制에 참석 못했다고 하였고, 게다가 이제는 날이 더워지고 손자의 병이 마음에 걸려 더더욱 갈 수 없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편지 전해 줄 인편이 없다가 이번에 倉吏가 가는 편으로 이 편지를 부친다고 하였다.
이 편지는 피봉이 누락되어 내용만으로는 수취인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없다. 단지 수취인은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며 형제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조덕린은 1711년 黃海都事에 부임하였다가 이듬해 체차되어 고향으로 돌아왔고, 이후 1716년 忠淸都事에 부임하였는데, 이 편지가 발급된 해인 1713년은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영양 注谷에 머물고 있을 때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발급인 조덕린은 본관은 漢陽, 자는 宅仁, 호는 玉川이며, 부친은 頵이다. 1677년 사마시에 입격하고, 1691년 문과에 급제하여 侍講院說書, 弘文館修撰, 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1725년 당쟁의 폐해와 노론의 득세에 관해 논한 10여조를 상소했다가 鍾城에 유배되었고, 1727년 丁未換局 때 풀려났다. 1728년 李麟佐의 난 때 嶺南號召使의 역할을 담당하였고, 난이 평정된 뒤 同副承旨에 올랐다. 1736년에는 1725년의 상소와 연관되어 노론의 탄핵을 받았고, 1737년 金聖鐸의 葛庵 李玄逸 伸救上疏에 연루되어 濟州로 유배 가던 도중에 康津에서 사망했다. 그는 사후 1738년에 사면되었고, 1750년, 1756년 두 차례 관작이 회복되었다가 환수되는 과정을 거쳐 1788년에 완전히 신원되었지만, 1803년에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다. 결국 1899년에 와서야 특명으로 復官되었다. 저서로는 『玉川集』이 전한다.
1차 작성자 : 김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