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1년 10월 13일, 權愭가 경차관에게 부탁을 청하기 위해 보낸 편지
1701년 10월 13일, 權愭(1650~1704)가 자형 趙德鄰(1658∼1737)에게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경차관에게 부탁을 청하라고 보낸 답장이다. 의성과 신풍 등의 노비 신공을 받지 못한 것과 목화 농사가 잘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추록하였다.
구체적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이어 두 번 편지를 보내주시고 또 맏 생질을 보니 매우 놀랍고 위안이 된다고 했다. 서릿바람 부는 계절에 모시는 상중의 체후는 편안함을 알게 되어 더욱 위로되고 마음이 후련해졌으나 매번 편지의 내용에서 지나치게 슬퍼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보니 걱정되고 근심되는 것이 평일에 당신에게 바라던 바가 아니라고 했다. 슬픔은 힘써 이치로 억누르고 또한 장사 날짜 때문에 마음을 수고롭게 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본인은 쇠병의 고생됨이 겨울 들어 더욱 심하고 더하여 公私債를 해결해야 하는 고통 때문에 매우 고민스럽다고 했다. 순흥 수령은 어렵지 않은 부탁에 대해 의혹하는 것을 풀지 않으니, 그 마음을 알 수 없으나 대개 이것은 먼저 자기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치우치게 주장하는 사람이니, 형의 거듭된 청은 다만 욕됨을 취할 뿐이라고 했다. 경차관은 반드시 그렇지 않을 것이니, 만약 인편이 있다면 그에게 부탁하는 것이 좋다는 뜻을 내비추었다. 中山의 행차에는 사람과 말이 비록 여가가 없으나, 감히 보내지 않겠습니까만 이 생질은 추워지면 매우 소홀해지니 지체하지 말고 화창한 날을 기다려 행차할 뿐이라고 했다.
상대방의 체후가 더욱 보중하길 바라는 마음을 전하며 편지를 끝맺은 이후 추록하였다. 그 내용은 의성의 신공 받는 일은 앞 회랑을 보수하는 일로 겨를이 없어 종을 보내지 못했고, 은풍 계집종은 시집가서 미치광이처럼 도망가 정처가 없어 신공을 받을 길이 없어 통탄할만하다고 했다. 작은 계집종은 맏조카가 돌아올 때에 붙잡아 보낼 것이며, 금년 목화 농사의 유명무실은 전년에 비해 심하여 혼인을 앞둔 집이 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고 걱정하였다.
발급인 권기의 자는 以敬이고, 호는 幷岩·鼎谷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생원으로 찰방 權尙正의 증손이며, 權壽夏의 맏아들이다. 수취인 조덕린의 자는 宅仁, 호는 玉川, 본관은 한양이다. 1677년 사마시에 합격했고, 1691년 문과 급제한 이후 교리·사간 등을 역임했고, 1725년 弼善으로 당쟁의 폐해를 상소한 문장 속에 노론의 득세를 비난한 내용이 당쟁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하여 함경도 鐘城에 유배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자 풀려나 부응교에 등용된 이후 동부승지까지 올랐으나, 1736년 서원의 濫設을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노론의 탄핵으로 이듬해 제주에 귀양 가던 도중 강진에서 죽었다.
1701년 권기가 조덕린에게 편지를 보낼 당시 조덕린은 좌랑을 역임하고 있어서, 피봉에 '조 좌랑' 이라고 표기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