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에 발급인 미상의 東閣 측에서 李啓魯 등의 注書 물망에 관한 서울의 정세와 褒題를 받은 상황 등을 전하기 위해 注谷으로 보낸 편지이다. 이 문서는 편지의 별지로 보인다. 즉 본 편지는 누락되고 피봉과 별지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별지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서울 소식을 전하는 내용이다. 5월 전에 李啓魯, 柳芝榮이 모두 注書 물망에 올랐다가 결국 욕을 당하여 류지영은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왔고, 이계로는 5월에 주서로 입궐했다. 그런데 이계로가 出來할 즈음에 다시 주서직 물망으로 首望은 金炳陸, 副望은 沈宜冕의 아들 沈履澤, 末望은 少論 가운데 한 사람인 李 아무개가 오르게 되었고, 따라서 이계로는 都承旨 李裕元과 이야기 하다가 이 상황에 대해, "우리 무리들이 유독 沈 某와 李 某보다 못하여 이러한 욕을 당하는 것인가?"라고 힐책 했다고 했다. 그러자 한양 내에서 여론이 모두 그의 말을 통쾌하고 시원한 일이라 여겼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어서 요즘 시대에 우리 무리 가운데 사람들은 이 일이든 저 일이든 막론하고 상대측 세력이 두려워 움츠리고 기운을 잃어버리지 않음이 없었다가, 이계로가 한 말을 들으니 생기가 돋게 한다고 하면서, 그는 懶隱 李東標의 진정한 후손이라고 칭찬하였다.
둘째는 이 편지를 叔贊 즉 趙彦育에게도 전하여 보여 달라는 부탁을 하는 내용이다. 이유는 그가 과거 보러 떠날 때 류지영이 위와 같은 욕을 당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셋째는 尹谷[윤이실]의 南氏 벗이 자신에게 답장을 받아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으니 윤곡 측 편지를 상대가 본 이후에 답장을 써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번 자신이 관할하는 지방 관청의 평가로 "관의 청렴하기가 물과 같아서 진실로 고아한 지조에 부응한다.[官淸如水, 允副雅操]"라는 褒題를 받았음을 알렸다. 이어서 자신에 대해 "물처럼 청렴하다[水淸]"고 한 것은 이미 근사하지도 않고, "고아한 지조[雅操]"라고 한 것도 더욱 그와 같지 않으니 매우 부끄럽고 송구하다고 하였다. 말미에는 포제를 받은 고을과 지방관 및 순위를 기록하였다. 즉 巨濟 李濟万, 草溪 李奎會 두 읍은 '下'를 받았고, 蔚山 尹興鎭, 彦陽 孫海遠, 興海 尹滋翊, 自如 金壽仁 세 읍과 한 驛郵는 '中'을 받았다고 했다.
위의 내용으로 미루어 발급자 '東閣' 측은 당시 지방관을 역임하고 있던 인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서울 소식에 빠르고, 또한 고을 직무 평가에서 포제를 받은 일을 기록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같은 집안 소장 문건 가운데 成赫壽가 보낸 서간이 있는데, 필체나 피봉에 '戶取閃'이 기록된 것으로 보면 동일인물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지만 확실하지 않다. 만일 이 문건이 성혁수의 별지라면 그가 영양 현감에 부임했던 1854년 12월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본문에서 언급된 李啓魯(1828~1886)는 본관은 眞城, 자는 聖建, 호는 石林이며 부친은 會相, 懶隱 李東標의 후손이다. 奉化에 거주하였다. 1851년 增廣試에 급제하여 承文院正字, 弘文館校理, 吏曹佐郞, 持平, 應敎 등을 역임했다. 江原道御使 시절 민정을 잘 살펴 通政大夫에 올랐고, 후에 副承旨, 參議, 副提學, 參判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石林集』이 전한다.
또한 柳芝榮(1828~1896)은 본관은 豐山, 자는 仲翁, 호는 志山이다. 1857년 庭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修撰, 承宣, 大諫, 參議, 安東府使, 金海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철종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류지영이 승정원 주서에 발탁된 시기는 1858년 6월 6일이다. 하지만 심이택과 류지영이 나란히 관직 물망에 오른 일은, 1859년 4월 16일에 館錄을 행했고, 같은 해 5월 17일에 都堂錄을 행했다는 기록에 있다. 관록이나 도당록은 모두 홍문관의 교리나 수찬을 선임하기 위한 추천록을 의미하는데,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주서직의 물망'은 사실 관록과 도당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叔贊은 趙彦育(1811~1881)의 자이다. 그는 본관은 漢陽, 자는 叔贊, 호는 竹樓이며, 부친은 星復이다. 玉川 趙德鄰의 현손이다. '尹谷南友'는 누구인지 자세하지 않다. 尹谷은 경북 의성군 점곡면 윤암리 소재로 尹谷院이 있었고, 윤이골[尹伊谷], 윤이실, 윤골[尹谷] 등으로 불렸으며, 영양 남씨 伊溪 南夢賚의 후손들이 세거하는 지역이다.
피봉에 언급된 수취인 정보로 '戶取閃宅'은 불분명하나, 여타 明文 등의 문서에 자주 나오는 "戶某宅"의 용례로 미루어 보면 "戶奴 取閃의 상전댁"이라는 의미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