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마을개관
화죽동(花竹洞)은 가야산 밑의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경지가 넓게 분포하며 북쪽으로 낙동강이 흐르며, 가야산에서 원류하는 옥계수가 흘러 유입된다. 자연마을로는 죽곡(竹谷)[대실], 노루목[장항(獐項)], 아래 법림[하법림(下法林)], 화전(花田)이 있다.
죽곡 마을은 뒷산에 대나무가 많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노루목은 가야산의 한줄기가 형제봉을 거쳐 다시 동으로 뻗은 줄기가 낮아지면서 대가천에 이르러 끝부분이 노루의 목과 같이 가늘고 길다하여 불려졌다. 아래 법림 마을은 법전동의 상법림과 대실 마을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다. 영조 때 청송심씨 심달지(沈達之)가 이 마을에 입향하여 그 후손들이 세거한다. 화전은 아래 법림 마을 앞 옥천을 건너 울미 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1991년 편찬된 『경북마을지』에 의하면 화죽리에는 성주이씨 26호, 성산이씨 17호, 청송심씨 9호, 야성송씨 6호, 경주이씨 5호, 초계정씨 4호 등이 거주한다.
마을에는 추월재(秋月齋), 우덕재(友德齋), 사의당(四宜堂) 등의 문화유적이 있다. 추월재는 노루목 마을에 있으며, 고려 때 청주이씨 문정공(文貞公) 이공승(李公升, 1099~1183)을 추모하는 재실이다. 우덕재는 문충공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이 귀양살이 할 때 지은 것이다. 그때 우연암(友蓮庵)으로 불렀는데, 1833년(순조 33) 수덕서원(粹德書院)으로 사액되었다가 대원군 때 훼철되어 우덕재로 불렸다. 사의당은 우재(尤齋) 이도재(李道載) 4형제의 우의를 기리는 종당(宗堂)이다.
자료의 내용
1912년 朝鮮總督府 臨時土地照査局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전국의 토지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 때 개인의 전답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토지신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해야 했으며, 만약 토지신고서를 제출하지 않는 지주가 있으면 그의 소유지는 國有地로 편입되었다. 이 같은 조치에 따라 경북 성주군 가천면 화죽동의 田畓과 垈地, 池沼, 林野, 墳墓地 등을 소유한 소유자들은 1912년 8월 30일부터 1914년 2월 18일까지 토지신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일제는 이를 근거로 『星州郡伽泉面花竹洞 土地調査簿』를 만들었다.
토지신고서의 제출은 여성도 가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남자들의 이름으로 신고하였다. 그 결과 어린이들이 신고주체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여자 이름이 공문서에 기재되는 것을 기피하였던 전통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화죽동의 토지는 모두 702필지 191,674평이다. 이 가운데 田은 187필지 32,705평, 畓은 385필지 143,912평, 垈는 123필지 13,854평, 林野는 4필지 775평, 墳墓地는 2필지 402평, 雜種地는 1필지 26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답이 전보다 필지 수에 있어서 2배, 면적에 있어서 4.4배 정도 많다.
『土地調査簿』의 所有者 住所欄은 혼란스러운 면이 있다. 토지 申告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직전에 이루어 졌기 때문에 소유자 주소는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의 〮군 ․ 면 ․ 동 체제에 따라 기재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성주군 대가면 용흥동의 옛 명칭인 本牙面 荷牙洞이 『토지조사부』에 보인다. 이 명칭은 1914년에 소멸되었지만,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자료 정리에 있어서 이런 경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유자 주소란에 주소가 기재되어 있지 않는 경우이다. 이것은 소유자 주소와 토지 소재지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주소란이 공란으로 처리된 경우는 토지 소유자 또는 신고자가 本洞民임을 의미한다. 주소가 기록되지 않은 경우에는 군 또는 면단위에서의 자료 통합을 위해서 토지소재지 동리 명을 그대로 주소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토지소재지의 군 ․ 면 ․ 동 명칭은 1914년 개편이후의 행정체제에 따랐기 때문에 타동민의 주소 표기와는 체제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토지조사부』 소유자 주소는 결과적으로 행정구역 개편 전후의 군 ․ 면 ․ 동체제가 혼재되어 있는 셈이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 군 ․ 면별 자료를 통합하고 소유자별로 정렬하여 주소를 재정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자료 이용에 있어서 이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소유자별로는 모두 民有地이다. 화죽동은 하법림동 · 화전동 · 상죽곡동 · 하죽곡동 · 대흥동 · 장산동의 일부가 병합된 것이다. 이 때문에 화죽동 · 하법림동 · 화전동 · 상죽곡동 · 하죽곡동 · 대흥동 · 장산동의 주소로 화죽동의 토지 소유를 파악할 수밖에 없다. 화죽동의 민유지 소유자는 총 179명이다. 이들 179명 가운데, 화죽동을 주소로 한 토지 소유자는 124명,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소유자는 55명이다. 화죽동 소유자의 성씨별 분포는 모두 17개 성씨로 李氏 65명, 金氏 16명, 沈氏 9명, 鄭氏 7명, 白氏 6명, 宋氏 4명, 朴氏 · 柳氏 각 3명, 姜氏 · 裵氏 각 2명, 權氏 · 魯氏 · 徐氏 · 孫氏 · 呂氏 · 千氏 · 河氏 등 각 1명이다. 화죽동을 주소로 한 소유자의 토지는 전 166필지 27,719평, 답 199필지 67,022평, 대지 119필지 12,356평, 임야 3필지 604평, 분묘지 1필지 313평, 잡종지 1필지 26평 등이다.
기타 및 특이사항
화죽동 本洞所有地로 임야 1필지 173평이 있다. 또한 수덕재 소유로 전 1필지 68평, 대지 1필지 994평이 있다.
자료적 가치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의 성주군 가천면 화죽동의 국유지와 민유지의 토지분포 상황, 개인 또는 門中, 書院, 鄕校, 私立學校 등의 토지소유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러나 『토지조사부』의 소유자가 곧 실재의 토지소유자가 아닌 경우도 있다. 같은 호에 거주하던 父子, 兄弟가 각각 토지신고서를 제출하기도 했고, 반대로 부자, 형제간의 개별 소유지를 한 사람의 이름으로 신고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分錄과 合錄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던 오랜 관행이었다. 또한 宗中財産을 종손 개인의 이름으로 신고한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토지조사부』를 통해 당시의 소유 실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토지조사부』의 자료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통해 1910년대의 전답분포나 토지소유현황 등 전반적인 추세를 살펴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土地調査事業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초적 사업 가운데 하나였고, 『토지조사부』는 바로 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식민지지배 정책과 과정, 土地 ․ 林野의 침탈의 과정, 규모 등을 살필 수 있다. 실제로 『토지조사부』에는 조선총독부의 토지침탈 국책기관이었던 東洋拓植株式會社 또는 일본인들의 토지소유 상황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토지조사부』가 동리단위로 작성되었고, 또 소유자의 거주지가 1914년 府 ․ 郡 ․ 面 ․ 洞里 통폐합 이전의 행정구역명으로 기재되어 있어서 개편 이전의 면리동의 행정편제, 동리의 규모, 호수, 거주 성씨, 개인별 토지소유 현황 등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