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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성주군(星州郡) 가천면(伽泉面) 신계동(新界洞)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9+KSM-XD.1912.4784-20170630.T47840706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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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증빙류-토지대장
내용분류: 경제-농/수산업-토지대장
작성주체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작성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작성시기 1912
형태사항 크기: 27 X 19.5
장정: 합철
수량: 94장
판식: 半葉匡郭, 有界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일본어
소장정보 원소장처: 성주군청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현소장처: 성주군청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안내정보

1912년 성주군(星州郡) 가천면(伽泉面) 신계동(新界洞)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1912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照査局)에서 1912년 8월 8일부터 1914년 1월 16일까지 경상북도(慶尙北道) 성주군(星州郡) 가천면(伽泉面) 신계동(新界洞)의 전답(田畓)과 대지(垈地), 임야(林野), 분묘지(墳墓地), 지소(池沼) 등의 소유자로부터 토지신고서를 제출받아 지번(地番), 가지번(假地番), 지목(地目), 지적(地積, 坪), 소유자(所有者)의 주소와 성명, 적요(摘要) 등을 기록하여 작성한 토지장부이다.
『朝鮮土地調査事業硏究』, 愼鏞廈, 韓國硏究院, 1979
『朝鮮土地調査事業の硏究』, 宮嶋博史, 東京大學 東洋文化硏究所, 1991
『慶北마을誌』, 경상북도‧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경상북도, 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1991
『星州마을誌』, 성주문화원, 1998
『경상도 700년사』, 경상도 700년사 편찬위원회, 2006
「日帝下 朝鮮土地調査事業 計劃案의 變更過程」, 『史林』 32, 남기현, 수선사학회, 2009
1차 작성자 : 김순주

상세정보

1912년 朝鮮總督府 臨時土地照査局에서 慶北 星州郡 伽泉面 新界洞의 田畓과 垈地, 林野, 墳墓地 등의 소유자로부터 신고서를 제출받아 작성한 토지 장부
星州郡伽泉面面新界洞土地調査簿
대상마을개관
新界洞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고개와 골짜기가 발달하였으며 하천이 마을을 가로질러 흐른다. 신촌적계 등이 병합되면서 그 이름을 따서 신계동이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떡뫼골[獨山], 쇠점[火赤, 鐵店, 紅開[洪開], 새마[新村, 祀神堂], 葛谷], 들리미가 있다. 떡뫼골은 가천면의 서쪽 끝에 있으며 지명은 돌목재의 떡뫼와 연관이 있다. 쇠점은 철기시대의 가마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새마는 쇠점의 동쪽으로 이어진 마을로 『京山志』에 의하면 민속신앙으로 신당이 모셔져 있어 신당촌이었으며, 이것이 신촌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갈골은 들리미 마을과 가까우며 동향을 하고 있다. 밀양박씨 朴潤熙와 경주이씨 李駿源 및 그 후손들이 살았는데, 이준원의 후손 李達榮은 의금부 도사를 역임했다. 들리미는 신계동의 남쪽에 위치하며 거창군으로 넘어가는 불기재[赤峴] 아래의 첫 마을이다. 불기재를 들고 넘는 마을이라고 하여 들리미로 불리게 되었다. 1991년 편찬된 『경북마을지』에 의하면, 신계동에는 경주최씨 13호, 성산이씨 7호, 김해김씨 6호 등이 거주한다. 문화유적 가운데 만귀정은 신계리 계곡의 폭포암 언덕 위에 성산이씨 李源祚(1792~1871)가 만년에 귀향하여 소요했던 정자이다.
자료의 내용
1912년 朝鮮總督府 臨時土地照査局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전국의 토지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 때 개인의 전답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토지신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해야 했으며, 만약 토지신고서를 제출하지 않는 지주가 있으면 그의 소유지는 國有地로 편입되었다. 이 같은 조치에 따라 경북 성주군 가천면 신계동의 田畓과 垈地, 池沼, 林野, 墳墓地 등을 소유한 소유자들은 1912년 8월 8일부터 1914년 1월 16일까지까지 토지신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일제는 이를 근거로 『星州郡伽泉面新界洞 土地調査簿』를 만들었다.
토지신고서의 제출은 여성도 가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남자들의 이름으로 신고하였다. 그 결과 어린이들이 신고주체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여자 이름이 공문서에 기재되는 것을 기피하였던 전통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신계동의 토지는 모두 1,128필지 436,636평이다. 이 가운데 田은 663필지 208,444평, 畓은 252필지 147,480평, 垈는 138필지 18,053평, 池沼는 39필지 51,499평, 林野는 2필지 39평, 墳墓地는 34필지 11,121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전이 답보다 필지 수에 있어서 2.6배, 면적에 있어서 1.4배 정도 많다.
『土地調査簿』의 所有者 住所欄은 혼란스러운 면이 있다. 토지 申告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직전에 이루어 졌기 때문에 소유자 주소는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의 〮군 ․ 면 ․ 동 체제에 따라 기재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성주군 대가면 용흥동의 옛 명칭인 本牙面 荷牙洞이 『토지조사부』에 보인다. 이 명칭은 1914년에 소멸되었지만,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자료 정리에 있어서 이런 경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유자 주소란에 주소가 기재되어 있지 않는 경우이다. 이것은 소유자 주소와 토지 소재지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주소란이 공란으로 처리된 경우는 토지 소유자 또는 신고자가 本洞民임을 의미한다. 주소가 기록되지 않은 경우에는 군 또는 면단위에서의 자료 통합을 위해서 토지소재지 동리 명을 그대로 주소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토지소재지의 군 ․ 면 ․ 동 명칭은 1914년 개편이후의 행정체제에 따랐기 때문에 타동민의 주소 표기와는 체제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토지조사부』 소유자 주소는 결과적으로 행정구역 개편 전후의 군 ․ 면 ․ 동체제가 혼재되어 있는 셈이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 군 ․ 면별 자료를 통합하고 소유자별로 정렬하여 주소를 재정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자료 이용에 있어서 이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소유자별로는 國有地는 전 1필지 105평 이고, 나머지는 모두 民有地이다. 신계동은 下赤洞 · 新村洞 · 葛洞 · 上赤洞 · 亭洞의 일부가 병합된 것이다. 이 때문에 하적동 · 신촌동 · 갈동 · 상적동 · 정동의 주소로 신계동의 토지 소유를 파악할 수밖에 없다. 신계동의 민유지 소유자는 총 256명이다. 이들 256명 가운데, 신계동을 주소로 한 토지 소유자는 156명,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소유자는 100명이다. 신계동 소유자의 성씨별 분포는 모두 35개 성씨로 具氏 3명, 權氏 2명, 金氏 24명, 都氏 3명, 朴氏 14명, 白氏 6명, 徐氏 3명, 成氏 2명, 宋氏 2명, 申氏 6명, 沈氏 3명, 安氏 2명, 呂氏 3명, 李氏 33명, 林氏 3명, 張氏 3명, 鄭氏 5명, 趙氏 2명, 崔氏 19명, 河氏 3명, 姜氏 · 盧氏 · 文氏 · 申氏 · 梁氏 · 禹氏 · 尹氏 · 全氏 · 朱氏 · 陳氏 · 蔡氏 · 千氏 · 韓氏 · 夏氏등 각 1명이다. 신계동을 주소로 한 소유자의 토지는 전 499필지 159,116평, 답 100필지 37,986평, 대지 130필지 16,583평, 임야 32필지 43,382평, 분묘지 16필지 3,740평, 잡종지 2필지 39평 등이다.
기타 및 특이사항
특이사항으로는 靑巖寺 소유로 답 1필지 826평과 海印寺 소유인 답 4필지 3,194평이 있다.
자료적 가치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의 성주군 가천면 신계동의 국유지와 민유지의 토지분포 상황, 개인 또는 門中, 書院, 鄕校, 私立學校 등의 토지소유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러나 『토지조사부』의 소유자가 곧 실재의 토지소유자가 아닌 경우도 있다. 같은 호에 거주하던 父子, 兄弟가 각각 토지신고서를 제출하기도 했고, 반대로 부자, 형제간의 개별 소유지를 한 사람의 이름으로 신고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分錄과 合錄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던 오랜 관행이었다. 또한 宗中財産을 종손 개인의 이름으로 신고한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토지조사부』를 통해 당시의 소유 실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토지조사부』의 자료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통해 1910년대의 전답분포나 토지소유현황 등 전반적인 추세를 살펴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土地調査事業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초적 사업 가운데 하나였고, 『토지조사부』는 바로 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식민지지배 정책과 과정, 土地 ․ 林野의 침탈의 과정, 규모 등을 살필 수 있다. 실제로 『토지조사부』에는 조선총독부의 토지침탈 국책기관이었던 東洋拓植株式會社 또는 일본인들의 토지소유 상황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토지조사부』가 동리단위로 작성되었고, 또 소유자의 거주지가 1914년 府 ․ 郡 ․ 面 ․ 洞里 통폐합 이전의 행정구역명으로 기재되어 있어서 개편 이전의 면리동의 행정편제, 동리의 규모, 호수, 거주 성씨, 개인별 토지소유 현황 등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朝鮮土地調査事業硏究』, 愼鏞廈, 韓國硏究院, 1979
『朝鮮土地調査事業の硏究』, 宮嶋博史, 東京大學 東洋文化硏究所, 1991
『慶北마을誌』, 경상북도‧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경상북도, 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1991
『星州마을誌』, 성주문화원, 1998
『경상도 700년사』, 경상도 700년사 편찬위원회, 2006
「日帝下 朝鮮土地調査事業 計劃案의 變更過程」, 『史林』 32, 남기현, 수선사학회, 2009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