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912년 성주군(星州郡) 청파면(靑坡面) 백운동(白雲洞)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9+KSM-XD.1912.4784-20170630.T47840607_1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증빙류-토지대장
내용분류: 경제-농/수산업-토지대장
작성주체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작성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작성시기 1912
형태사항 크기: 27 X 19.5
장정: 합철
수량: 156장
판식: 半葉匡郭, 有界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일본어
소장정보 원소장처: 성주군청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현소장처: 성주군청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안내정보

1912년 성주군(星州郡) 청파면(靑坡面) 백운동(白雲洞)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1912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照査局)에서 1912년 1월 15일부터 1913년 12월 10일까지 경상북도(慶尙北道) 성주군(星州郡) 청파면(靑坡面) 백운동(白雲洞)의 전답(田畓)과 대지(垈地), 임야(林野), 분묘지(墳墓地), 지소(池沼) 등의 소유자로부터 토지신고서를 제출받아 지번(地番), 가지번(假地番), 지목(地目), 지적(地積, 坪), 소유자(所有者)의 주소와 성명, 적요(摘要) 등을 기록하여 작성한 토지장부이다.
『朝鮮土地調査事業硏究』, 愼鏞廈, 韓國硏究院, 1979
『朝鮮土地調査事業の硏究』, 宮嶋博史, 東京大學 東洋文化硏究所, 1991
『慶北마을誌』, 경상북도‧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경상북도, 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1991
『星州마을誌』, 성주문화원, 1998
『경상도 700년사』, 경상도 700년사 편찬위원회, 2006
「日帝下 朝鮮土地調査事業 計劃案의 變更過程」, 『史林』 32, 남기현, 수선사학회, 2009
1차 작성자 : 김인호

상세정보

1912년 朝鮮總督府 臨時土地照査局에서 慶北 星州郡 靑坡面 白雲洞의 田畓과 垈地, 林野, 墳墓地 등의 소유자로부터 신고서를 제출받아 작성한 토지 장부
星州郡靑坡面白雲洞土地調査簿
대상마을개관
白雲洞은 통일신라 시기 685년(신문왕 5) 一利郡 狄山縣 속해 있었고, 757년(경덕왕 16) 星山郡 都山縣 所件坊에 편재되었다. 1845년 목사 金鑅이 소건방을 靑坡坊으로 개명하였다. 1895년(고종 23)에는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청파면 백운동으로 편성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는 大里面이 청파면에 편입되었다. 1934년에는 청파면과 志士面이 병합되어 修倫面이 되었다. 1988년 5월에는 각동이 리로 개정되어 현재는 수륜면 백운리로 편재되어 있다.
백운동은 성주군 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慶南 陜川郡 伽倻面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백운동은 道恩菴 근처 능선에 백운대가 있어서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학발[鶴足], 가락골[楸洞], 牛首洞, 북두림[北斗, 북다락뫼[鼓樓山]], 新村, 솔티[松峴], 진등[金堂], 中基, 밤티[栗峴] 등이 있다.
학발은 성주군 최남단으로 서쪽에 경남 합천군으로 향하는 늘밭고개가 있고 남쪽에는 넓은 평원인 늘밭[坪田, 於田]이 있다. 임진왜란 이후 합천 冶爐에서 전주이씨인 李枯聖이 입향하였고 그 후손인 李喆宇가 세거하였다. 또한 성산이씨 李養中, 성산배씨 裵舜裳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가라골은 학발 동쪽 산골에 위치한 마을로 가래나무가 많아 ‘가라골’이 되었다. 1670년에 여양진씨 陳昌佑가 합천 雲峴에서 입향하였으며 후손인 陳興智가 숙종 때 오위도총관을 지냈다. 우수동高靈郡 경계 쌍미리[雙龍] 계곡 근처에 위치한 마을이다. 뒷산이 소의 머리와 닮았다고 하여 우수동이 되었다. 『정감록』에 등장하는 萬壽洞은 이 마을로 보고 있는데 그 근거는 牛자를 파자하면 千과 十이니 萬이고 首를 차음하여 壽가 된 것이다. 죽산박씨, 함안조씨가 산다. 북두림은 성주군 서쪽, 가야산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 남쪽 北斗山에 가야산 龍起山城의 북다락이 있어서 마을 지명이 되었다. 李挺一李文潤의 세거지이고 서흥김씨 金仁植의 지낸 곳이기도 하다. 또한 순천박씨가 살고 있다. 신촌은 늘밭고개 아래 산간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 계곡가에 돌로 쌓은 신단이 있다. 고대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근대까지 이 단에서 동제를 지낸다. 또한 神堂을 모신다고 하여 신당촌이라 불리다가 후에 ‘新村’이 된다. 솔티는 신촌에서 늘밭고개로 오르는 곳에 위치한 마을로 주변에 솔밭이 많아 마을의 지명이 되었다. 과거 북두림에서 진등에 이르는 옛길이 있었다. 중기는 가야산 남쪽에 위치하였으며 백운동의 중심 마을이다. 신라 때 法水寺가 있었으나 후에 터만 남아 ‘중터’라 불리게 되었다. 법수사는 742년에 지은 것으로 천칸이 넘는 대사찰이었다. 935년에는 신라 경순왕의 막내아들 梵空이 입산한 곳이기도 하다. 북쪽에 용기골[龍起]은 명당으로 용기사 터와 암자 터가 많이 남아있으며 기우제를 지낸 곳이다. 봉우리에 있는 용기산성은 가야시대부터 있던 것으로 임진왜란과 양 호란 때 침략을 받지 않았다. 바래봉[正見峰]최치원의 『石順應傳』에 의하면 할미산신과 천신이 교감하여 대가야왕을 낳았다고 하는데 이를 기리는 신당이 이곳에 있다. 또한 마을 산기슭에는 雲葉亭이 있는데 순천박씨 朴宗緖의 학당이다. 진등은 중기 앞에 있는 마을로 진흙이 많아 길이 질척하다하여 진등이라 하였다. 이곳에는 1800년 후기까지 金塘寺라는 절이 있었다. 밤티는 수륜면에서 합천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주막촌이다. 마을 뒤쪽에 도은골 북바위降仙潭이 있다. 또한 밤티고개 옆에 물도랑은 조선초 高尙輔가 귀향와서 농업용수를 위해 사재를 써서 만든 수로이다.
1991년 편찬된 『경북마을지』에 의하면 백운리에는 김해김씨 22호, 순천박씨 12호, 여양진씨 6호, 김녕김씨 5호, 성산이씨 5호, 그 밖에 75호가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자료의 내용
1912년 朝鮮總督府 臨時土地照査局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전국의 토지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 때 개인의 전답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토지신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해야 했으며, 만약 토지신고서를 제출하지 않는 지주가 있으면 그의 소유지는 國有地로 편입되었다. 이 같은 조치에 따라 경북 성주군 청파면 백운동의 田畓과 垈地, 池沼, 林野, 墳墓地 등을 소유한 소유자들은 1912년 1월 15일부터 1913년 12월 10일까지 토지신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일제는 이를 근거로 『星州郡靑坡面白雲洞 土地調査簿』를 만들었다.
토지신고서의 제출은 여성도 가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남자들의 이름으로 신고하였다. 그 결과 어린이들이 신고주체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여자 이름이 공문서에 기재되는 것을 기피하였던 전통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백운동의 토지는 모두 1,898필지 611,710평이다. 이 가운데 田은 800필지 147,845평, 畓은 805필지 342,488평, 垈는 209필지 19,964평, 林野는 63필지 97,642평, 墳墓地는 18필지 3,293평, 雜種地는 3필지 478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답이 전보다 필지 수에 있어서 차이가 없지만, 면적에 있어서 2.3배 정도 많다.
『土地調査簿』의 所有者 住所欄은 혼란스러운 면이 있다. 토지 申告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직전에 이루어 졌기 때문에 소유자 주소는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의 〮군 ․ 면 ․ 동 체제에 따라 기재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성주군 대가면 용흥동의 옛 명칭인 本牙面 荷牙洞이 『토지조사부』에 보인다. 이 명칭은 1914년에 소멸되었지만,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자료 정리에 있어서 이런 경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유자 주소란에 주소가 기재되어 있지 않는 경우이다. 이것은 소유자 주소와 토지 소재지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주소란이 공란으로 처리된 경우는 토지 소유자 또는 신고자가 本洞民임을 의미한다. 주소가 기록되지 않은 경우에는 군 또는 면단위에서의 자료 통합을 위해서 토지소재지 동리 명을 그대로 주소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토지소재지의 군 ․ 면 ․ 동 명칭은 1914년 개편이후의 행정체제에 따랐기 때문에 타동민의 주소 표기와는 체제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토지조사부』 소유자 주소는 결과적으로 행정구역 개편 전후의 군 ․ 면 ․ 동체제가 혼재되어 있는 셈이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 군 ․ 면별 자료를 통합하고 소유자별로 정렬하여 주소를 재정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자료 이용에 있어서 이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소유자별로는 國有地는 대지 1필지 192평 이고, 나머지는 모두 民有地이다. 백운동중기동 · 신촌동 · 송현동 · 학포동 · 추동 · 우수동 · 조양동의 일부가 병합된 것이다. 이 때문에 백운동 · 중기동 · 신촌동 · 송현동 · 학포동 · 추동 · 우수동 · 조양동의 주소로 백운동의 토지 소유를 파악할 수밖에 없다. 백운동의 민유지 소유자는 총 406명이다. 이들 406명 가운데, 백운동을 주소로 한 토지 소유자는 223명,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소유자는 183명이다. 백운동 소유자의 성씨별 분포는 모두 37개 성씨로 金氏 47명, 李氏 36명, 陳氏 25명, 朴氏 24명, 鄭氏 10명, 崔氏 9명, 申氏 8명, 都氏 · 文氏 · 裵氏 · 徐氏 각 5명, 姜氏 · 黃氏 각 4명, 孫氏 · 尹氏 · 張氏 각 3명, 郭氏 · 南氏 · 梁氏 · 呂氏 · 兪氏 · 許氏 각 2명, 公氏 · 施氏 · 白氏 · 卞氏 · 薛氏 · 宋氏 · 愼氏 · 安氏 · 吳氏 · 柳氏 · 林氏 · 全氏 · 諸氏 · 趙氏 · 千氏이다. 백운동을 주소로 한 소유자의 토지는 전 647필지 102,233평, 답 344필지 94,361평, 대지 201필지 18,665평, 임야 38필지 40,973평, 분묘지 10필지 1,585평, 잡종지 3필지 478평 등이다.
기타 및 특이사항
백운동 本洞所有地로 임야 5필지 1,877평이 있다. 또한 일본인이 답 2필지 1,373평을 가지고 있고, 해인사가 전 2필지 743평, 답 82필지 56,976평이다.
자료적 가치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의 성주군 청파면 백운동의 국유지와 민유지의 토지분포 상황, 개인 또는 門中, 書院, 鄕校, 私立學校 등의 토지소유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러나 『토지조사부』의 소유자가 곧 실재의 토지소유자가 아닌 경우도 있다. 같은 호에 거주하던 父子, 兄弟가 각각 토지신고서를 제출하기도 했고, 반대로 부자, 형제간의 개별 소유지를 한 사람의 이름으로 신고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分錄과 合錄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던 오랜 관행이었다. 또한 宗中財産을 종손 개인의 이름으로 신고한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토지조사부』를 통해 당시의 소유 실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토지조사부』의 자료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통해 1910년대의 전답분포나 토지소유현황 등 전반적인 추세를 살펴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土地調査事業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초적 사업 가운데 하나였고, 『토지조사부』는 바로 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식민지지배 정책과 과정, 土地 ․ 林野의 침탈의 과정, 규모 등을 살필 수 있다. 실제로 『토지조사부』에는 조선총독부의 토지침탈 국책기관이었던 東洋拓植株式會社 또는 일본인들의 토지소유 상황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토지조사부』가 동리단위로 작성되었고, 또 소유자의 거주지가 1914년 府 ․ 郡 ․ 面 ․ 洞里 통폐합 이전의 행정구역명으로 기재되어 있어서 개편 이전의 면리동의 행정편제, 동리의 규모, 호수, 거주 성씨, 개인별 토지소유 현황 등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朝鮮土地調査事業硏究』, 愼鏞廈, 韓國硏究院, 1979
『朝鮮土地調査事業の硏究』, 宮嶋博史, 東京大學 東洋文化硏究所, 1991
『慶北마을誌』, 경상북도‧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경상북도, 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1991
『星州마을誌』, 성주문화원, 1998
『경상도 700년사』, 경상도 700년사 편찬위원회, 2006
「日帝下 朝鮮土地調査事業 計劃案의 變更過程」, 『史林』 32, 남기현, 수선사학회, 2009
1차 작성자 : 김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