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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삼봉서당(三峰書堂)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8+KSM-XF.1916.4784-20160630.016526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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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삼봉서당, 청천서당
작성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작성시기 1916
형태사항 크기: 56.3 X 36.3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마령 전주류씨 호고와종택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916년 삼봉서당(三峰書堂) 통문(通文)
1916년 11월에 삼봉서당(三峰書堂)에서 이석문(李碩文 1713~1773) 문집 간행에 관한 사안으로 청천서당(晴川書堂)으로 보낸 통문(通文)이다. 이석문은 임오화변 당시 사도세자에 대한 의리를 지키다가 삭탈관작당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은거하며 북비공(北扉公)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1차 작성자 : 명경일

상세정보

1916년 11월에 三峰書堂에서 李碩文 문집 간행에 관한 사안으로 晴川書堂으로 보낸 通文
1916년 11월에 三峰書堂에서 李碩文 문집 간행에 관한 사안으로 晴川書堂으로 보낸 通文이다. 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遯齋 李碩文(1713~1773)은 생전에 訓鍊院 主簿를 역임했고, 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그는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화변 와중에 무관의 신분으로 부당함을 간하다가 삭탈관직되어 낙향하였다. 통문의 그의 충절에 대해 피력하고 있다. 즉 영조연간의 화변이 일어나자, 죽음을 무릎쓰고 간하다가 곤장을 맞고 파직되어 통곡하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주군인 사도세자가 있는 북쪽으로 협문내고 살았다고 하며, 임오화변을 주도한 金尙魯洪啓禧와는 교류를 끊었다고 한다.
그의 충절에 대해서는 정조가 가상하다는 말을 하신 바가 있고, 고종이 ‘충성을 다했으니 포상해야 한다.’라고 하교하시고 그 자손을 등용시키라는 말을 하신 바가 있다. 그러나 현재는 墓道 근처에 무덤을 쓰는 변이 일어나기도 했고, 그의 문집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三峰書堂에서는 그의 문집을 내기로 결의하였고, 이를 여러분과 함께 거행하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오는 2월 22일에 三峰書堂에서 모임을 갖고자 하니 참석을 요청한다고 하고 있다.
1차 작성자 : 명경일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16년 삼봉서당(三峰書堂) 통문(通文)

通文。
右通諭事。生等每念吾鄕故主簿贈兵曹參判遯齋李公危忠茂節。未始不歎息而雪涕也。嗚呼。英廟某年之變。尙忍
言哉。刀鉅在前矣。鼎鑊在後矣。公時居下寀。慨然欲無生背負正考爲莊祖。乞命排闈爭死。竟決杖罷官。痛哭而歸田里。
遯撤其扉而北之。不復與魯禧客相徵逐也。盖公之忠之節。攷之健陵朝樹立可嘉之喩。上皇朝竭忠宜褒之敎。已足以
焜耀窮宙。而終有賜酹祠廟錄用鬯孫之典。固知公議之定其亦有俟乎。必返之天也夫。何幸瀾覕翻視儀節。爲弁髦不知尊尙
之。爲何事而乃至有墓道逼葬之變。良可爲世道一倍嗟惋也。生等俱以鄕井後生。得以備數於官裳之倫者。曷嘗非公之遺風
餘韻是賴是籍。而今去公之世。已餘百載。遺編實紀。亦付蟫笥。尙未及沐梨。而公諸世可勝惜哉。玆因本堂之集。僉議峻發。擬
與同慕此義者。創修一契。隨力鳩合羨而息之圖。所以鋟布其遺編實紀。與吾黨共之。玆以來二月二十二日定會于本郡
三峰書堂。伏願。好懿諸公。齊聲協贊。俾終敦成。以爲扶樹世敎之地。千萬幸甚。
右文通。
柳生員僉座前。
丙辰十一月二十日。晴川書堂會中。幼學宋大欽呂泰會都元相金龜應李穆鏞郭相魯李奎熙李禹永金昌穆金鍾海宋雲翼李東熙金華鎭宋聖欽。前參奉都稷相
幼學金䲮鎬宋鶴運李東旭李秉祚李承慤金鼎林李宗俊郭{氵+粦}金在瓚李在厚都相仁康載淳。前博士李基容。幼學金文鎬呂秉淵宋寅逵
李賚相丁敦燮宋浚弼李億相。前參奉金聖林。幼學李貞基李明源郭正燮金行直李熊奎李敏厚兪以培。前參奉李晋錫。幼學呂廈奎李啓源金庸直呂恭會
金昌淑郭載坤施友相丁永鎭等。

匏谷
小谷
三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