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7월 25일, 金道和가 상대방 선조의 世稿를 읽은 이후 하자가 없다는 내용을 담아 보내는 편지
1909년 7월 25일, 金道和가 상대방 선조의 世稿를 읽은 이후 하자가 없다는 내용을 담아 보내는 편지이다.
김도화는 얼마 전 상대방과 함께 이틀 밤을 묵은 것이 정다운 마음에 위로되고 흡족한 것은 아니었으나 한번 헤어지고 멀어지니 그리움이 더욱 간절했는데, 뜻밖에 達夫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멀리서 찾아왔고 아울러 상대방의 편지를 전해 받으니 상대방이 자신을 돌보아준 뜻이 더욱 두터워 지극한 감복을 사례할 수 없다고 했다. 상대방은 서늘한 기후에 어머니를 모시며 만 가지로 기쁘고 성실하게 학문하는 재미가 날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되어 축원하는 마음에 위로됨이 절실하다고 했다.
김도화는 오래 자리에 누워 병으로 신음하여 떨치고 일어날 희망이 전혀 없다고 했다. 지나온 일들을 돌이켜 보니, 마음만 아플 뿐이라고 했다. 兒孫輩는 잡되고 소란한 일에 시달려 旬月간 공부도 하지 못하니 근심스럽다고 했다. 상대방 선대의 世稿는 깨끗하게 기록되어 있어 이를 통해 효도하는 정성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다시 자세히 살펴보라는 상대방의 부탁으로 여러 번 읽어보았으나 하자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마지막에는 예식을 생략하니 정으로 살펴봐달라고 하면서 편지를 끝맺었다.
본문의 ‘達夫’는 南孝順(1863~1942)의 자이다. 본관은 영양으로, 서산 김흥락의 문인이다. 문집이 전한다.
발신자 김도화(1825∼1912)의 본관은 義城, 자는 達民, 호는 拓菴이다. 그는 안동 출신으로, 柳致明의 문하에 출입했다. 1893년 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안동 유림 대표로 활약했으며, 다음해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태봉전투에 참전했다. 그 뒤 노환으로 은거하는 가운데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맞아 상소와 격문 등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였다. 문집으로 『척암집』이 있다.
19세기말~20세기 초 영해 호지마을의 영양남씨는 선조의 선양사업으로 묘소 정비, 재사건립, 문집간행 등 위선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당시 영남의 명유였던 김도화에게 세고를 다시 한번 읽어 봐달라고 부탁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진행된 것이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