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2월 21일, 金道和가 호지마을의 영양 남씨가 부탁한 덕릉참봉 南靖邦의 묘도비문을 작성해주면서 함께 보낸 편지
1909년 2월 21일에 金道和(1825∼1912)가 호지마을의 영양 남씨가 부탁한 덕릉참봉 南靖邦(1557~1592)의 묘도비문을 작성해주면서 함께 보낸 편지이다.
김도화는 길이 멀어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아 탄식했는데, 뜻밖에 상대방 일족 두 명이 먼 길에 방문하였고 아울러 상대방 측에서 보낸 정중한 편지를 받아 정성스런 마음에 보답할 길이 없다고 했다. 편지를 읽고 상대방이 봄을 보내는 시기의 일상생활이 보호받고 있는 점을 알게 되어 위로가 된다고 했다. 본인은 노쇠한 병이 들어 문을 닫고 수양하는 것을 달게 여기고 있다고 표현하고 달리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이어 영양 남씨의 선조 덕릉참봉 南靖邦의 묘도비에 관한 글은 막중하여 늙고 별 볼일 없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10대 동안 계분을 맺은 막중한 사이임을 생각해 보니, 감히 거칠고 졸렬한 글이나마 사양하지 못한다고 했다.
마지막에는 김도화가 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여가에 쓴 솜씨 없는 글을 드리니, 살펴본 이후에 글을 쓸지 말지를 헤아려 보길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나머지 사연 역시 병들고 게을러 예식을 다하지 못하니 상대방 측에서 잘 살펴봐 달라고 하면서 마무리 했다.
김도화가 작성한 남정방의 묘도비문은 영양 남씨 괴시파 영감댁에서 보관하다가 2012년~2013년에 걸쳐 다른 고서 · 고문서와 함께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했다. 묘도비문을 보면, 남정방은 惟一齋 金彦璣(1520~1588)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학문이 돈독했다고 한다. 지행합일이 갖추어지고 名實이 높아져 조정의 선발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편지에 ‘10대 동안의 계분’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남정방이 김언기에게 배울 때 賁趾 南致利, 梧峰 申之悌, 梅隱 金安繼와 도의로 서로 사귀며 함께 공부했다. 김안계는 김도화의 선조로, 두 집안은 그때부터 世誼를 이어왔으며, 김도화는 10세의 사귐을 중히 여겨 묘갈명을 써준 것이다. 묘갈은 南朝溵과 南朝{氵+昇} 등이 앞장서 세우려고 했다. 남정방의 무덤 옆에 묘갈이 있었으나 글자가 마멸되어 읽을 수 없어 이들이 고쳐 세우기를 도모한 것이다. 문중에서는 젊은이 南國炳과 南鎭五를 보내 시문을 청하게 했다. 김도화는 당시 영남의 대표적인 명유였기 때문에 영양 남씨는 오랫동안 세의를 맺어온 김도화에게 행장 · 묘갈명 등을 부탁했다.
발신자 김도화의 본관은 의성, 자는 達民, 호는 拓菴이다. 그는 안동 출신으로, 柳致明의 문하에 출입했다. 1893년 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안동 유림 대표로 擧義通文을 내었다. 다음해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태봉전투에 참전하였으며, 그 뒤 노환으로 은거하면서도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맞아 상소와 격문 등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였다. 문집으로 『척암집』이 있다.
濠村의 영양 남씨는 15세 사재감 참봉 南斗遠(1610~1674)이 처음으로 터를 잡은 이후 그곳에 살게 되었다. 남두원의 아들 南鵬翼(1641~1687)은 문과 급제하여 중앙의 관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갈암 이현일, 숭재 이숭일 등을 비롯한 명현들과 교유했다. 이후 호촌의 영양 남씨는 퇴계학파 내의 ‘갈암학단’과 학문적 입장을 함께 했으며, 당대의 명유들과 교유하는 가운데 영해의 대표적인 명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