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2월 11일, 金道和가 상대방 선조 寢郞公의 묘도비문을 지어 보내면서 쓴 편지
1909년 2월 11일, 金道和가 상대방 선조 寢郞公의 묘도비문을 지어 보내면서 쓴 편지이다.
상대방과 편지 왕래가 없어 瞻耿하는 수고로움만 있다가 뜻밖에 상대방의 편지를 받게 되어 감사하고 위로됨을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고 했다. 편지를 보고 새봄의 조용한 완상에 신의 도움이 있고, 공부하는 재미가 더욱 나며, 집안 식구들이 모두 화목함을 알게 되어 마음 깊이 위로하고 축원드린다고 했다.
병든 친구인 본인은 병상에 몸져누워 저승사자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어린 손자들은 용무에 골몰하고 있고 응접에 지쳐 공부할 수 없는 상황이니 旬月 공부가 염려가 된다고 했다.
편지의 본론에서는, 상대방이 부탁한 寢郞公 묘도비에 관한 글은 마땅히 사양했어야 하나 감히 저버릴 수 없어 얽어내어 부친다고 했다. 그러나 언필이 모자라고 가벼워 후세에 드리우기에는 부족할까 걱정이니, 이것이 송구하다고 했다.
마지막 인사에서는 한번 만나는 것조차 어그러진 것은 형세 때문으로 탄식해도 소용없다고 하며, 다만 면학하시어 벗의 바람에 부응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발신자 김도화(1825~1912)의 본관은 義城, 자는 達民, 호는 拓菴이다. 그는 안동 출신으로, 柳致明의 문하에 출입했다. 1893년 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안동 유림 대표로 擧義通文을 내었다. 다음해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태봉전투에 참전했으며, 그 뒤 노환으로 은거하면서도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맞아 상소와 격문 등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였다. 문집으로 『척암집』이 전한다.
편지의 수신자는 알 수 없지만 영해 濠村[호지마을]의 영양 남씨에게 보낸 것이다. 19세기말~20세기 초 영해 호촌의 영양남씨는 묘소 정비, 재사 건립, 문집의 간행 등 위선사업과 문중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의성 김씨와 영양 남씨는 혼인과 학문으로 깊은 교유를 나눴기 때문에, 영양 남씨는 당시 영남의 명유였던 김도화에게 寢郞公 묘도비문을 부탁할 수 있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