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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김도화(金道和)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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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김도화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909
형태사항 크기: 19.9 X 41.1
장정: 낱장
수량: 2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덕 괴시 영양남씨 괴시파 영감댁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909년 김도화(金道和) 서간(書簡)
1909년 2월 11일, 김도화가 상대방 선조 침랑공(寢郞 公)의 묘도비문을 써주면서 보낸 편지이다. 상대방이 보내온 편지를 읽고 상대방과 그 가족의 화목함을 알게 되어 축하드린다고 했으며, 이어 본인과 손자의 안부를 전했다. 상대방이 부탁한 묘도비문은 마땅히 사양했어야 하나 감히 저버릴 수 없어 얽어내어 부친다고 했다. 언필이 모자라고 가벼워 송구스럽다는 내용도 적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

상세정보

1909년 2월 11일, 金道和가 상대방 선조 寢郞公의 묘도비문을 지어 보내면서 쓴 편지
1909년 2월 11일, 金道和가 상대방 선조 寢郞公의 묘도비문을 지어 보내면서 쓴 편지이다.
상대방과 편지 왕래가 없어 瞻耿하는 수고로움만 있다가 뜻밖에 상대방의 편지를 받게 되어 감사하고 위로됨을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고 했다. 편지를 보고 새봄의 조용한 완상에 신의 도움이 있고, 공부하는 재미가 더욱 나며, 집안 식구들이 모두 화목함을 알게 되어 마음 깊이 위로하고 축원드린다고 했다.
병든 친구인 본인은 병상에 몸져누워 저승사자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어린 손자들은 용무에 골몰하고 있고 응접에 지쳐 공부할 수 없는 상황이니 旬月 공부가 염려가 된다고 했다.
편지의 본론에서는, 상대방이 부탁한 寢郞公 묘도비에 관한 글은 마땅히 사양했어야 하나 감히 저버릴 수 없어 얽어내어 부친다고 했다. 그러나 언필이 모자라고 가벼워 후세에 드리우기에는 부족할까 걱정이니, 이것이 송구하다고 했다.
마지막 인사에서는 한번 만나는 것조차 어그러진 것은 형세 때문으로 탄식해도 소용없다고 하며, 다만 면학하시어 벗의 바람에 부응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발신자 김도화(1825~1912)의 본관은 義城, 자는 達民, 호는 拓菴이다. 그는 안동 출신으로, 柳致明의 문하에 출입했다. 1893년 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안동 유림 대표로 擧義通文을 내었다. 다음해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태봉전투에 참전했으며, 그 뒤 노환으로 은거하면서도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맞아 상소와 격문 등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였다. 문집으로 『척암집』이 전한다.
편지의 수신자는 알 수 없지만 영해 濠村[호지마을]의 영양 남씨에게 보낸 것이다. 19세기말~20세기 초 영해 호촌의 영양남씨는 묘소 정비, 재사 건립, 문집의 간행 등 위선사업과 문중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의성 김씨와 영양 남씨는 혼인과 학문으로 깊은 교유를 나눴기 때문에, 영양 남씨는 당시 영남의 명유였던 김도화에게 寢郞公 묘도비문을 부탁할 수 있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09년 김도화(金道和) 서간(書簡)

濠村 做案 回敬。
龜村 謝狀。 謹封。
過從旣闊。書替並闕。第有瞻耿之
勞。意表獲接
情訊。感慰無可言。且審新春
靜玩有相。做味益珍。庇節均宜。
慰禱切切。病契。頹臥床笫。惟
符到之俟。焉有好況耶。小孫輩。
又汨於冗務。疲於應接。不得拚
做。旬月工夫。亦是悶念。
先寢郞公隧道文字。何以謬及
於老弊之物也。當以實牢辭。而追
念事契。有不敢負者。玆以構
拙付去。然筆萎言輕。恐不足
以垂後。是爲可悚。一顧緯繣。勢
所然耳。何必深歎耶。惟努力勉學。以副
老友之望。千萬。餘擾甚。不宣式。惟
情照。
己酉 二月 十一日。病契 道和 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