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1월 11일, 金道和가 영해 濠村 영양 남씨 선조의 世稿를 교정한 이후 보내는 편지
1909년 11월 11일에 金道和(1825∼1912)가 영해 濠村 영양 남씨 선조의 世稿를 교정한 이후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서로의 안부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는 편지의 본론에 해당하는 것으로 세고 교정에 대한 소감이다. 내용은 계절인사로 시작된다. 가을이 지나 어느덧 겨울도 또한 절반이 지났으나 소식이 거의 막혀서 매우 그리웠는데, 뜻밖에 편지를 받게 되어 서로 만나 이야기하는 것과 거의 같다고 했다. 김도화는 편지를 받고 상대방 가족이 모두 복되고, 상대방은 부모님 모시는 여가에 공부하는 재미가 날로 좋음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요즘 몸을 지키는 대책은 오직 문을 닫아걸고 공부하는데 있을 뿐이니, 더욱 스스로 독려하여 벗들의 바람에 부응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다음에는 김도화의 안부를 전했다. 해를 건너도록 병으로 칩거하여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여, 抑詩의 뜻을 생각할 때 마다 그것 때문에 몹시 서글프다고 했다. 김도화는 衛武公이 95세가 되어 「抑」 詩를 지어 사람을 시켜 날마다 곁에서 외게 하여 스스로를 경계한 것을 모범삼아 그 역시 「抑」 시를 곁에 두고 경계하는 가운데 삶을 다독여 나가고자 했으나 병으로 원하던 생활을 지속해 나가지 못하는 아쉬움과 서글픔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본론에서는 상대방 선조의 世稿에서 문헌의 성대함을 볼 수 있으니, 부럽고 감탄스럽다고 했다. 교정은 늙고 혼미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지만, 상대방의 말씀이 정중하여 망령되이 수정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혹여 비웃음이 있을까 부끄럽고 두렵다고 했다. 마지막에는 혼미하고 피곤하여 편지를 줄이니 정으로 살펴봐 달라고 하면서 편지를 끝맺었다.
발신자 김도화의 본관은 의성, 자는 達民, 호는 拓菴이다. 그는 안동 출신으로, 柳致明의 문하에 출입했다. 1893년 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안동 유림 대표로 활약했으며, 다음해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태봉전투에 참전했다. 그 뒤 노환으로 은거하는 가운데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맞아 상소와 격문 등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였다. 문집으로 『척암집』이 있다.
19세기말~20세기 초 영해 호지마을의 영양 남씨는 선조의 선양사업으로 묘소 정비와 여러 곳의 재사를 건립했고, 문집의 간행 등 위선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당시 영남의 명유였던 김도화에게 부탁한 세고의 교정도 그 연장선상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요즘 몸을 지키는 대책은 오직 문을 닫아걸고 공부하는데 있을 뿐이니’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20세기 초 일제의 침략으로 성리학적 가치관으로 무장한 유림들은 은거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가치관을 고수해 나갔던 시대 상황이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