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8월 12일, 金道和가 서로 친했던 정의를 생각하여 상대방이 부탁한 행장을 틈을 내어 작성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는 편지
1904년 8월 12일에 金道和(1825∼1912)가 서로 친했던 정의를 생각하여 상대방이 부탁한 행장을 틈을 내어 작성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는 편지이다.
김도화는 먼저 안부 인사를 전했다. 지난해에 만나 뵈어 종종 그리운 마음이 鉅鹿 아래에 있지 않은 적이 없다고 했다. 뜻밖에 상대방 아들이 어렵게 멀리서 찾아와 주고 아울러 보내온 편지가 진중하니, 어떻게 사례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서늘한 가운데 편안히 계시는 일상생활이 계절에 맞게 신의 도움을 받고 가족들도 잘 지내고 있음을 알아 더욱 위로됨이 절절하다고 했다. 김도화는 노년에 아내를 잃은 것이 몹시 슬프고 더욱이 기년복을 이미 벗어 마음이 텅 빈 것 같음이 더욱 심하여 다만 외롭게 혼자 남은 탄식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본론에서는 상대방이 부탁한 행장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돌아가신 영감의 행장은 당세 작가가 해야 할 일이지만 잘못한 부탁이 멀리까지 미쳤다고 하면서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문장이 힘이 없고 말도 가벼우니 어떻게 이 부탁을 감당하겠냐만, 同門의 정의가 마음에 남아 있어 잊을 수 없으며, 상대방이 부탁한 것은 또한 옛것을 강론하며 서로 친하게 지냈던 정의에서 나온 것이니, 문장력이 없다고 해서 사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류도화는 우선 이것을 받아두고 틈을 내어 못난 솜씨로 幽明을 저버리지 않을 계획을 도모하고자 하는데, 다만 성취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모른다고 했다. 나머지는 允契가 말로 전할 것이라고 하면서 편지를 맺었다.
발신자 김도화의 본관은 의성, 자는 達民, 호는 拓菴이다. 그는 안동 출신으로, 柳致明의 문하에 출입했다. 1893년 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안동 유림 대표로 활약했으며, 다음해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태봉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노환으로 은거하면서도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맞아 상소와 격문 등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였다. 문집으로 『척암집』이 전한다.
김도화는 자신의 선조 梅隱 金安繼(1556~1599)가 남흥수의 8대조 南靖邦(1557~1592)와 함께 惟一齋 金彦璣(1520~1588)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여 맺어진 두 집안의 世誼를 매우 귀하게 여겼다. 김도화는 류치명의 문인이었는데, 수신자는 알 수 없지만 호지마을의 영양 남씨 가운데 류치명에게 수학한 인물이 있다. 편지로 미루어 류치명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우의를 돈독히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당시 영양 남씨가 영남의 명유였던 자신에게 문자를 부탁해오자 정성껏 글을 써주었던 것이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