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12월 27일에 金道和(1825~1912)가 南興壽(1813~1899)의 행장을 지어 준 것에 대해 상대방의 사례와 함께 답례로 보내준 음식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는 편지이다.
편지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절 인사의 서두에는 상대방이 거주하는 곳이 영해의 호지마을[濠村]이라 김도화가 살고 있는 일직 龜村과 멀어 소식과 우편이 끊어졌는데 한 해가 저물어 감에 따라 더욱 아쉽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 상대방이 하인을 통해 보내준 편지의 내용이 간절한데다가 위장을 개운하게 해줄 생선도 함께 보내주어 노인을 우대하는 상대방의 정중한 마음에 감복했다고 한다.
다만 12월 달이라 깊어가는 추운 계절에 상대방의 건강 회복이 더딘 것을 알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상대방의 연령이 그리 많지 않아 조섭을 잘했겠지만 병이 오랫동안 낫지 않은 까닭을 알지 못해 안타까워하면서, 퇴계 이황이 남씨에게 보낸 편지인 「答南時甫書」에 있는 구절을 가지고 병을 조섭하는 하나의 방도로 삼으라고 조언했다. 그 내용은 "갈매기 내려앉은 백사장과 송아지 노니는 언덕 같은 장소에서 마음 가는대로 이리 저리 노닌다."라는 구절이다. 온화한 봄에 몸과 마음을 편안한 곳에 놔두면 병의 차도가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드러냈다.
그 다음에는 상대방 아들의 공부에 대해 언급했다. 김도화는 상대방의 아들을 본 적이 있었는데, 포부가 뛰어나고 언론이 정당한 것으로 미루어 그가 가진 기국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다만 아버지의 병 때문에 아들이 공부 기일을 정하지 못하여, 공부에 집중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며, 그가 편책을 가하여 나날이 공부의 성취가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했다.
김도화는 1825년 생으로 편지를 작성할 당시 이미 여든에 가까워 본인을 공허한 껍데기만 남아 세간에 붙어살고 있다고 표현했다. 아울러 지나온 나날들에 대해 "천지간에 하나의 좀[蠹]"이라고 하면서, "하늘이 아직 남은 날을 빌려주는 까닭은 과연 무슨 뜻인가?"에 대해 번민했다. 김도화는 衛 武公이 95세가 되어 「抑」이라는 시를 지어 사람을 시켜 날마다 곁에서 외게 하여 스스로를 경계한 것을 모범삼아 그 역시 「抑」시를 곁에 두고 경계하는 가운데 삶을 다독여 나갔다.
김도화는 상대방 ‘尊先’의 행장을 지었는데, 망령되지만 그와 같은 문하의 벗이라는 이유로 작성해 주었다고 했다. 김도화는 영양 남씨가 자신의 글에 대해 매우 칭찬하고 장려를 해주어 더욱 부끄럽고 움츠러드는 마음을 느꼈다. 그는 韓愈의 「祭柳子厚文」에 나오는 ‘不善爲斲 血指汗顏 巧匠傍觀 縮手袖間’을 빗대어 "어설픈 작품이 훌륭한 장인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음을 알겠는가?"라고 하면서 자신을 더욱 낮추었다. 몇 군데 살펴봐야 할 부분들은 마땅히 상대방의 지시를 기다렸다가 바르게 고칠 의향이 있으니, 헤아려 달라고 했다.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는 보내준 음식들이 넉넉하고 많아 상대방의 지극한 뜻을 알겠으며, 이를 감사히 받겠다고 했다. 다만 오고가는 예절 상 본인도 답례를 해야 하나 갖추어 줄 물건이 없어 매우 송구스럽다고 했다. 나머지 사연은 본인이 병들고 게을러서 생략하니 정으로 살펴봐 달라고 하면서 편지를 끝맺었다.
발신자 김도화의 본관은 의성, 자는 達民, 호는 拓菴이다. 그는 안동 출신으로, 柳致明의 문하에 출입했다. 1893년 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안동 유림 대표로 활약했으며, 다음해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태봉전투에 참전했다. 그 뒤 노환으로 은거하면서도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맞아 상소와 격문 등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였다. 문집으로 『척암집』이 있다.
濠村의 영양 남씨는 15세 사재감 참봉 南斗遠(1610~1674)이 처음으로 터를 잡은 이후 그곳에 살게 되었다. 남두원의 아들 南鵬翼(1641~1687)은 문과 급제하여 중앙의 관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갈암 이현일, 숭재 이숭일 등을 비롯한 명현들과 교유했다. 이후 호촌의 영양 남씨는 퇴계학파 내의 ‘갈암학단’과 학문적 입장을 함께 했으며, 당대의 명유들과 교유하는 가운데 영해의 대표적인 명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편지에서 언급된 김도화가 지은 행장은 濠隱 南興壽의 것으로 보인다. 편지 내용에서 김도화가 ‘尊先’과 같은 문하에 출입했다고 했는데, 남흥수와 김도화는 류치명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13세 南靖邦(1557~1592)은 김도화의 선조 梅隱 金安繼(1556~1599)와 惟一齋 金彦璣(1520~1588)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여 두 집안은 오랫동안 世誼를 이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