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2월 18일, 李中業이 상중의 수신자에게 장례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 보낸 편지
1900년 2월 18일 李中業(1863∼1921)이 상중의 수신자에게 장례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 보낸 답장편지이다.
먼저 상대방과 그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신병을 아직까지 앓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 先師의 장지와 장례일은 먼저 정한 곳과 점친 날로 정해져서 音容과 典型이 영원히 사라지게 되어서 애통하고 그립다고 하고 이어서 상대방이 지난 편지에서 ‘여럿이 함께 있을 때에는 絰을 두른다’라고 한 것은 선배들이 이미 정해 놓은 論旨와 부합한다고 하고, 선사의 장례 절차에 대해 두루 언급하고 있다. 끝으로 公私의 사정이 급하고 몸도 병들고 제사가 있어서 뜻대로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고 한스럽다고 하고 있다. 추신으로 允初[李中善]로부터 듣기에 상대방이 星峰으로 향하는 길에 이곳에 들렸다가 金溪의 葬所에 갈 것이라고 하는데 그 말이 사실인지를 묻고, 달부형에게는 바빠서 위문하지 못해 죄송함을 전하고 있다.
先師란 서산 金興洛을 지칭한 말인데 이 편지가 쓰여지기 직전 해인 1899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喪葬의 절차를 의논한 것으로 보인다.
이중업은 본관은 眞城, 자는 廣初, 소자는 桂祥, 호는 起巖이다. 李滉의 12세손으로 아버지는 資憲大夫 承旨 晩燾인데, 경술국치 후에 斷食으로 순국하였다.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저술로는 《기암유고》 28권 14책, 《대학정의》, 《양전합선》 등이 있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