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3월 29일, 金道和가 영해 濠村의 영양 남씨가 부탁한 여러 가지 글 가운데 쓴 것과 쓸 것에 대해 알려주는 편지
1900년 3월 29일, 金道和가 상대방이 부탁한 여러 가지 글 가운데 쓴 것과 쓸 것에 대해 알려주는 편지이다.
편지는 격식을 생략한다는 말로 시작된다. 김도화는 지난번에 왕림해 주신 것과 이번 편지에 따뜻한 마음이 더욱 은근하여 갖가지로 감사한 마음을 보답할 길이 없다고 했다. 상대방은 여묘살이의 건강을 때에 맞추어 지탱하고 보위하며, 모시고 행하는 服履가 즐겁고 훌륭하며, 공부하는 맛이 날로 돈독해짐을 알게 되어 더욱 위로되는 마음이 절실하다고 했다. 본인은 줄곧 쇠잔해져 계속 자리에 누워 신음하고 있으니, 이는 저승사자가 온다는 소식이지만 걱정할 것이 못된다고 했다. 단지 어린 손자가 아직도 건강하지 못하여 신경이 쓰일 따름이라고 했다.
이어 상대방이 부탁한 여러 가지 글에 대하여 언급했다. 『晩栖記語』는 지시한 대로 얽어내었으나 필력이 변변치 못해 현판과 문설주의 누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 안타까운데, 이것은 걱정할 만한 것이라고 했다. 지난번 올린 輓詞를 다시 보니 미진한 마음이 있어 다시 단율로 보완하여 올리니, 상대방에게 자세히 보고 밀쳐달라고 했다. 書塾에 관한 시는 전에 차운한 것이 있어 夾紙에 써 올리나, ‘卄川亭韻’은 바빠 짓지 못했으며, 다음 인편을 기다려 도모할 것이니 헤아려 달라고 했다. 『龜陰集』 부록은 지난번에 이미 구두하고 표점하여 收入할 것을 소지로 삼았으나, 본가에서 어찌 처리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우편으로 편지를 쓰다 보니 다 쓰지 못하니, 나머지 사정은 잘 살펴 주길 바란다며 편지를 끝맺었다.
편지의 내용 가운데 ‘書塾’은 南興壽(1813~1899)가 1847년 경 지은 槐濠書塾을 가리키며, ‘卄川亭’은 南鵬翼(1641~1687)이 1680년경에 세운 정자이다. 『龜陰集』은 金光壽(1801~1871)의 시문집으로, 그의 본관은 義城, 자는 孟實, 호는 龜陰이다.
발신자 김도화(1825~1912)의 본관은 義城, 자는 達民, 호는 拓菴이다. 그는 안동 출신으로, 柳致明의 문하에 출입했다. 1893년 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안동 유림 대표로 활동했으며, 다음해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태봉전투에 참전했다. 그 뒤 노환으로 은거하면서도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맞아 상소와 격문 등을 통해 일제에 항거했다. 문집으로 『척암집』이 전한다.
19세기말~20세기 초 영해 濠村[호지마을]의 영양 남씨는 묘소 정비, 재사 건립, 문집의 간행 등 위선사업과 문중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당시 영남의 명유였던 김도화에게 부탁한 세고의 교정도 그 연장선상에서 진행된 것이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