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10월 23일, 李光魯 외 7인이 葛庵 선생의 墓碣을 세우는 자리에 몸소 참석하지 못하고 年少者 한 사람과 부조만 보내는 것에 대하여 송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하여 杏亭의 회중으로 보낸 편지
1897년 10월 23일에 李光魯, 李源 등이 葛庵 선생의 墓碣을 세우는 자리에 몸소 참석하지 못하고 年少者 한 사람과 부조만 보내는 것에 대하여 송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하여 杏亭의 회중으로 보낸 편지이다.
먼저 지난 번 갈암 선생의 묘도에 비석을 세운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는 우리 유림이 높이고 지켜야 할 도리 상 마땅한 일이라 하였다. 그러나 비석의 전면에 다만 7자만 쓴 데 대하여서는, 人爵의 있고 없음이 선생의 높은 덕에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나, 우리 유림의 침통한 심정은 지극하다 하였다. 이어서 겨울 막바지의 추위 속에 대사를 추진해야 하니 마음이 많이 쓰일 것을 염려하고, 자신들도 마땅히 그 자리에서 힘을 다해야 하나, 모두 쇠병에 신음하거나 용무에 골몰하여 젊은 사람 하나만 막중한 자리에 참석하도록 하니 초청한 뜻을 저버린 것일까 두렵다 하고 부조 5꿰미를 보낸다는 말을 덧붙였다.
李光魯, 李源, 李承弼, 李承源, 李敬魯, 李道厚, 李承復 등 7명이 연명하였다.
杏亭은 갈암의 묘소가 있는 영해 창수면 인량리의 소지명이다. 본래의 묘소는 안동 금소리 금양 북쪽 기슭에 있었는데, 1706년 안동 남쪽 신사동 언덕으로 옮겼다가, 1832년(순조32)에 다시 영해 서쪽 인량리의 杏亭 巳向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