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4월 15일, 金興洛이 상대방이 별지에 쓴 글의 조목에 의견을 달았고, 부탁한 ‘塾韻’은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전하는 편지
1895년 4월 15일, 金興洛(1827∼1899)이 상대방이 별지에 쓴 글의 조목에 의견을 달았고, 부탁한 ‘塾韻’은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전하는 편지이다.
편지는 안부로 시작된다. 상대방의 소식이 막혀 답답했는데, 심부름꾼을 때맞추어 보내 정다운 정으로 안부를 전해주어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다. 초여름에 상대방 모친과 조모님의 건강은 많이 복되고, 부모 모시고 학문에 힘쓰시는 것도 나아졌으며, 자식들이 상대방을 모시는데 도리가 있어서 온화하고 기쁜 즐거움이 있다고 하여 부러운 마음이 깊다고 했다. 다만 상대방이 선조의 緬禮를 경영하고 있는데 마땅한 땅을 찾지 못한 것 때문에 염려된다고 했다.
김흥락은 오래된 담증이 빌미가 되어 수개월간 자리에 누워 있다가 조금 나아졌으나 몸이 좋지 않아 떨쳐 일어나지 못하며, 쇠약하고 게으른 것이 이와 같으니 다시 더 나아지길 어찌 바라겠냐고 한탄했다.
김흥락은 상대방이 부탁한 글을 써준 듯한데, 상대방은 자신이 써 준 글을 보고 벗으로 또한 아끼는 자로 마땅히 경계의 말이 있어야 하나 도리어 분수에 넘치는 격려를 해주어, 본인은 편지를 읽을수록 황송하고 땀이 나서 며칠간 편안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아울러 ‘塾韻’은 상대방의 뜻에 부응해야 하지만, 병으로 생각이 완전히 고갈되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별지에 상대방이 쓴 것은 모두 정성스럽게 생각하고 힘써 연구한 것에서 나온 것으로 쉽지 않다고 했다. 근래에 정력이 쇠약하여 힘써서 글을 배치하지 못하여 대략 각 조목 아래에 본인의 의견을 써놓았으나 도리에 맞지 않을 것이니 논박하여 가르쳐 줄 것을 기다린다고 했다. 懋雍이 닥친 일은 매우 슬픈 일이며, 하관하는 일이 완전하지 못하다고 들었는데, 애달고 수고로운 일이 많을 것 같아 염려된다고 했다. 편지를 쓰는 가운데 눈이 아파 대략 쓰고 줄이니 살펴봐 달라고 하면서 편지를 마무리했다.
편지 내용에서 ‘塾韻’은 濠隱 南興壽(1813~1899)가 영해 호지마을에 건립한 槐濠書塾의 운을 부탁한 것으로 짐작된다. 1892·1894년에도 영양 남씨가 김흥락에게 글을 부탁하고 써 주는 과정에서 주고받은 여러 편지가 이 집안에 전한다. ‘懋雍’은 李璧鎬(1874~?)를 가리키며, 그의 본관은 진성, 자는 弘瑞이며, 李中浩의 아들이다. 1894년(고종 31) 소과에 합격했다.
발신자 김흥락의 본관은 義城, 자는 繼孟, 호는 西山이다. 학봉 김성일의 嫡長孫으로, 이황·이상정·류치명으로 이어지는 근세 영남유림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명이다. 김흥락은 遺逸로 천거되어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諸訓集說要覽』·『初學箴』·『畏天說』·『拙守要訣』·『主一說』 등을 지었고, 문집으로 『西山集』이 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