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4월 17일, 金興洛이 써준 문자에 대해 상대방이 감사 편지를 보내오자, 상대방의 근황을 묻고 자신의 안부를 전하면서 쓴 편지
1895년 4월 17일에 金興洛(1827∼1899)이 써준 문자에 대해 상대방이 감사 편지를 보내오자, 상대방의 근황을 묻고 자신의 안부를 전하면서 쓴 편지이다.
김흥락은 그리워하던 상대방이 보내준 편지를 읽고 상대방 어머님의 건강이 여러 가지로 보위되고, 혼정신성하던 뒤 끝에 상대방의 건강도 잘 보존하며, 아들도 돌아간 뒤 여독을 면하였고, 書塾에서 꾸준히 공부를 익힌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위로가 되었다고 했다. 다만 상대방이 선대 묘소를 이장하는 일이 있다고 하니 애타는 마음과 노고를 상상할 수 있으며, 吉地를 정해서 잘 봉안했는지 궁금해 했다.
김흥락 자신은 상황을 겨우 보존하고 있으나, 가족들이 여러 달 병환에 시달리고 있어 공부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고, 나머지 상황은 모두 여전하다고 했다. 김흥락이 이전에 써준 문자[글]은 중대한 일이지만, 졸렬한 글 솜씨로 더럽혀 드린 것이 아닌지 염려하였다. 상대방이 먼 길에 일부로 사자를 보내어 두터운 마음을 주어 더욱 편치 못한 마음을 드러냈다. 노쇠함을 무릅쓰고 대략 쓰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니, 살펴봐달라는 내용으로 편지를 마무리하였다.
발신자 김흥락의 본관은 義城, 자는 繼孟, 호는 西山이다. 학봉 김성일의 嫡長孫이고, 아버지는 능주목사를 역임한 金鎭華이다. 그는 이황, 이상정, 유치명으로 이어지는 근세 영남유림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명이다. 遺逸로 천거되어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諸訓集說要覽』, 『初學箴』, 『畏天說』, 『拙守要訣』, 『主一說』 등을 지었고, 문집으로 『西山集』이 있다.
편지의 작성 연도는 1895년이다. 당시 영해 호지마을은 濠隱 南興壽(1813~1899)를 중심으로 묘소 정비와 재사 건립 등의 위선사업을 전개했고, 50세 이상의 노인을 봉양할 목적으로 양로소를 건립했으며,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儀契를 설치하고 곳간을 세워 어려움에 처한 마을 사람들을 구휼했다. 槐濠書塾을 건립하여 마을의 자제들이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으며, 자제와 후손들을 영남 지역의 유명한 학자의 문하에 출입하여 학문을 익히게 했다.
의성 김씨와 영양 남씨는 오랫동안 세의가 이어왔으며, 당대에는 영양 남씨의 젊은이들이 김흥락에 수학했다. 뿐만 아니라 의성 김씨와 영양 남씨는 당시에 중첩적인 혼인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등 교유가 매우 깊었다. 영양 남씨는 행장, 묘갈명, 기 등을 영남의 유명한 학자에게 부탁했는데, 김흥락에게도 글을 부탁했음을 알 수 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