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3월 17일, 金興洛이 상대방의 아들이 몇일 머물며 공부하다 돌아가는 길에 부치는 안부편지
1895년 3월 17일, 金興洛이 상대방의 아들이 며칠 머물며 공부하다 돌아가는 길에 부치는 안부편지이다.
편지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좋은 만남을 이루지도 못했는데 먼저 편지를 보내 주시니 감사함이 깊다고 했다. 봄에 상대방의 연로하신 건강이 시절에 맞추어 만복하고, 모시는 끝에 건강을 잘 보중하고 계심을 알았으니 더욱 위로가 된다고 했다.
김흥락은 쇠병의 침범이 심해져 매일 약탕관과 병상 사이를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아울러 마을에 이름 없는 질병이 참악하게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상대방의 아들이 멀리서 온 것은 그 마음이 우연한 것이 아니어서 매우 감탄스러우나, 본인이 병이 들어 서로 계발할 수 없어 부끄럽고 군색할 따름이라고 했다. 머물렀던 여러 날 연이어 여러 가지 소란이 있어 조용할 겨를이 없어서 이별의 마음이 더욱 슬프다고 했다. 나머지는 갖추어 쓰지 못하니, 살펴 봐 달라고 하면서 편지를 맺었다.
발신자 김흥락(1827∼1899)의 본관은 義城, 자는 繼孟, 호는 西山이다. 학봉 김성일의 嫡長孫이며, 이황·이상정·류치명으로 이어지는 근세 영남유림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명이다. 그는 遺逸로 천거되어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諸訓集說要覽』·『初學箴』·『畏天說』·『拙守要訣』·『主一說』 등을 지었고, 문집으로 『西山集』이 있다.
편지의 수신자는 영해 濠南[호지마을]의 영양 남씨이다. 영양 남씨와 의성 김씨는 오랫동안 학문적인 관계망을 이어왔다. 뿐만 아니라 남흥수는 의성 김씨 金麟洛을 사위로 맞이했고, 손자 朝鷹도 의성 김씨와 혼인시키는 등 중첩적인 혼인을 통해 교유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였다. 이 편지는 상대방의 아들이 김흥락에게 공부하러 온 내용을 보여주는 것으로, 의성 김씨와 영양 남씨의 학문적 교류의 일면을 알 수 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