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1월 27일, 金道和가 服中에 호지마을의 영양 남씨가 부탁한 南紀衡의 행장을 작성해 주면서 안부 인사와 함께 보낸 편지
1894년 1월 27일에 金道和(1825~1912)가 服中에 호지마을의 영양 남씨가 부탁한 南紀衡(1700~1756)의 행장을 작성해 주면서 안부 인사와 함께 보낸 편지이다.
편지의 앞부분에는 남흥수의 편지를 받아 감사드리는 마음을 표현했다. 이어 정월을 맞이하여 상대방이 壽를 누리는 가운데의 일상생활이 더욱 평안하고 복되며, 슬하의 손자들도 차례대로 예쁘고 즐겁게 해주며 생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상대방의 근황은 길상한 복이 모인 것으로 축하드리는 마음도 함께 전했다. 편지를 작성할 당시 김도화는 服中이었는데, 나쁜 것들이 쌓여 재앙을 초래하여 결국 아무 죄도 없는 이로 하여금 열흘에서 달포 남짓한 시기에 죽게 했으며, 통곡하고 애석할 따름만은 아니라고 했다.
본론에서 김도화는 상대방의 선조인 寺正公[남기형]의 행장 초본을 작성해 주면서, 필력이 딸리고 사람됨이 가벼워 아마도 먼 후대에까지 징험하고 믿음으로 삼기에는 부족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자신을 매우 장려해 주는 것을 통해 상대방의 도량을 확인하게 되어 더욱 부끄럽고 송구하다고 했다.
편지에서 남흥수가 선조의 행장을 부탁하기 전에 김도화에게 이미 窩記도 부탁했음을 알 수 있다. 窩記를 통해 자신의 언사와 어구가 범범하고 졸렬하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대가를 구하여 상대방 집안의 아름다움으로 삼을 것이지 늙고 별 볼일 없는 자신에게 부탁한 것에 대해 반드시 나중에 글 솜씨가 없는 사람이라 견책할 것이고, 이것이 개탄스러울 뿐이라고 했다. 자신의 글에 대해 매우 겸손한 자세를 보였다.
편지의 수신자가 언급되지 않았지만 ‘晩窩 壽几下’란 표현으로 미루어 남흥수(1813~1899)로 추정했다. 남흥수가 1893년에 거처하는 곳 옆에 晩棲軒을 지은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영양 남씨 21세로 평생 선조의 선양 사업에 힘썼다. 선조의 묘를 관리하기 위해 여러 곳에 재사를 건립했고, 입천정과 마계정사를 중건하여 경영하고 선조의 덕업을 찬양했으며, 50세 이상의 노인을 봉양할 목적으로 ‘양로소’의 재정을 확충하고 운영하였다. 집안과 마을 자제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 문중의 구성원들과 接契를 만들었고, 마을에 槐濠書塾을 건립하여 마을의 자제들의 공부를 지원해주었다.
발신자 김도화의 본관은 의성, 자는 達民, 호는 拓菴이다. 그는 안동 출신으로, 柳致明의 문하에 출입했다. 1893년 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안동 유림 대표로 擧義通文을 내었다. 다음해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태봉전투에 참전하였으며, 그 뒤 노환으로 은거하면서도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맞아 상소와 격문 등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였다. 문집으로 『척암집』이 있다.
김도화는 자신의 선조 梅隱 金安繼(1556~1599)가 남흥수의 8대조 南靖邦(1557~1592)와 함께 惟一齋 金彦璣(1520~1588)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여 맺어진 두 집안의 世誼를 매우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 영해 호지마을의 영양 남씨가 당시 영남의 명유였던 자신에게 여러 종류의 문자를 부탁해오자 정성껏 글을 써주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