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2월 20일, 金興洛이 상대방 손자들이 배움을 청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상대방의 안부와 자신의 근황을 담아 보내는 편지
1894년 2월 20일에 金興洛(1827∼1899)이 상대방 손자들이 배움을 청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상대방의 안부와 자신의 근황을 담아 보내는 편지이다.
서두에는 편지를 오랫동안 하지 못했으니 그리운 마음 간절하다고 했다. 상대방의 두 손자가 나란히 멀리서 방문하여 편지를 소매 끝에 넣어왔는데, 상대방이 자신을 돌보는 마음이 매우 넘치니, 깊이 우러러 감사하다고 했다. 이어 온화한 봄에 한가로이 수양하는 체후는 장수의 아름다움을 누리고, 집안의 모두도 차례대로 평안하고 순조로우며, 고요한 집에서 공부를 그치지 않고 후손을 기르는 것은 더욱 실마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80의 나이에 이른 상대방의 정력에 축하하는 마음도 전했다.
이어 자신의 근황을 알렸다. 일찍이 노쇠하여 배우지 못하고, 병이 생활이 되었다고 했다. 소위 끙끙 앓는 소리는 글 읽는 소리를 빼앗았고, 약봉지가 책보다 많은 자가 어찌 한 점이라도 터득하고 한걸음이라도 나아가는 걸 기약하겠는가라고 하면서 자신의 상황을 한탄했다. 이러한 상황도 모르고 배움을 청하러 멀리서 말 타고 보낸 상대방의 어리석음에 대해 언급하며, 교분이 깊어 상대방의 부탁을 감히 거부하지 못하지만 부끄럽다고 했다. 돌아가면 가정에서 돈독하게 가르침이 있을 것으로 믿고 멀리서 배움을 구하지 말라고 했다.
발신자 김흥락의 본관은 義城, 자는 繼孟, 호는 西山이다. 학봉 김성일의 嫡長孫으로, 이황 · 이상정 · 류치명으로 이어지는 근세 영남유림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명이다. 김흥락은 遺逸로 천거되어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諸訓集說要覽』·『初學箴』·『畏天說』· 『拙守要訣』·『主一說』 등을 지었고, 문집으로 『西山集』이 있다.
수신자는 미상이다. 다만 편지의 작성 연도가 1894년인데, 수신자의 나이가 여든이고 손자를 김흥락에게 공부시킨 점 등의 이유로 濠隱 南興壽(1813~1899)로 추정했다. 남흥수는 영양 남씨 21세로 평생 선조의 선양 사업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집안과 마을 자제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 문중의 구성원들과 接契를 만들었고, 마을에 槐濠書塾을 건립하여 마을 자제들의 공부를 지원해준 인물이다.
남흥수의 손자 朝洼(1867~1918)는 김흥수의 문인이고, 그 밖의 손자들도 김흥수의 문하에 출입했다. 영양 남씨와 의성 김씨는 오랫동안 학문적인 관계망을 이어왔으며, 혼반이 형성되었다. 당시 남흥수는 의성 김씨 金麟洛을 사위로 맞이했고, 손자 朝鷹도 의성 김씨와 혼인시키는 등 중첩적인 혼인을 통해 두 성씨 사이의 교유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였다. 이 편지도 두 성씨의 학문적 교류의 일면을 보여준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