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11월 6일, 金道和가 상대방이 부탁한 글을 써주면서 쓴 편지
1893년 11월 6일, 金道和가 상대방이 부탁한 글을 써주면서 쓴 편지이다.
처음에는 인사말로 시작한다. 함께 세상을 살아가다가 어느덧 늙어 가는데, 저 멀리 바다 끝을 바라보니, 매번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탄식이 있다고 했다. 뜻밖에도 종손자가 산 넘고 물 건너 본인을 찾아주고, 아울러 감사한 편지를 받게 되니 구구하게 감복되어 감사드릴 바를 모르겠다고 했다. 11월에 壽를 누리는 존체와 움직임이 계절에 맞게 만복을 누리고, 여러분들이 고루 잘 지내는 것을 알게 되니, 우러러 위로와 축하를 한다고 했다.
다음은 편지를 쓴 이유다. 格外로 은혜로운 명이 갑작스럽게 미천한 본인에게 이르러 분수를 헤아려보니 송구하여, 운신할 바를 모르겠다고 했다. 글을 잘못 부탁한 것은 실로 미천한 본인이 감당할 바가 아니나, 상대방의 命이니 감히 박절하게 거절할 수 없어, 전에 어렵게 작성하여 드렸다고 했다. 그러나 글을 잘 짓지 못하여 하자가 많으니, 한 번 살펴본 후에 장독 뚜껑으로 쓰라 명하고, 다시 당세의 명문장가를 구하여 믿을 만한 글씨로 후세에 전할 여지를 도모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마지막에는 편지를 맺는 인사이다. 편지 사연의 나머지는 다만 頤養을 보중하기를 바라며, 감사의 의식을 갖추지 못하니 잘 살펴 주길 바란다고 했다.
발신자 김도화(1825∼1912)의 본관은 義城, 자는 達民, 호는 拓菴이다. 그는 안동 출신으로, 柳致明의 문인이다. 1893년 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안동유림 대표로 활동했으며, 다음해 의병장에 추대되어 태봉전투에 참전했다. 그 뒤 노환으로 은거하면서도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맞아 상소와 격문 등을 통해 일제에 항거했다. 문집으로 『척암집』이 전한다.
편지의 수신은 ‘槐里 壽几下 下執事’로 되어 있다. 영해 괴시리의 영양 남씨에게 보내는 것으로, 당시 영양 남씨는 재사 건립, 묘소 정비 등 위선사업을 활발히 했고, 정자·서숙 건립, 의장소·학계의 마련 등 문중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위의 편지글에서 영양 남씨가 부탁한 글의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영양 남씨는 당시 영남의 명유였던 김도화에게 글을 부탁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