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10월 13일, 金興洛이 상대방 손자의 공부를 돌봐줄 수 없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
1892년 10월 13일, 金興洛(1827∼1899)이 상대방 손자의 공부를 돌봐줄 수 없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이다.
편지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흥락은 먼 곳에서 우러러 상대방을 사모한다고 한 다음, 한 해가 저물어 갈 무렵 문득 상대방의 편지를 받고 돌보아 주는 뜻이 남들보다 뛰어나 두렵고 감사하여 마음을 가눌 수 없다고 했다. 첫 추위에 평소의 기체가 절서를 따라 충만하고 평온하며, 書塾에서 한가로이 지낼 때 날마다 지팡이 짚고 이리저리 소요하는 즐거움이 있으니, 감축 드린다고 했다.
김흥락은 서늘한 뒤에 병에 잘 걸리는 것이 이미 연례행사처럼 되었는데, 요사이 매우 바쁘게 일한 것 때문에 온갖 질병이 번갈아 이르니 염려가 적지 않다고 했다. 아울러 집안의 근심과 경계가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눈썹을 펼 날이 없으니, 알릴만한 즐겁고 좋은 일이 없다고 했다. 雲祖에 대한 追贈은 가문의 영광이지만, 날씨가 추워 많이 모인다면 일의 두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상대방의 손자가 본인을 찾아 온 것은 헛된 것은 아니지만, 본인은 텅 비고 비루하여 서로 계발해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동료들 또한 매우 적어서 유익한 벗을 취하는 것이 찾아온 뜻에 부합하지 않으니, 서숙으로 돌아가 어른을 모시며 조용히 독실하게 공부하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나머지는 병 때문에 어지러워 갖추지 못하니 살펴봐 달라고 하면서 편지를 끝냈다.
‘雲祖’는 金涌(1557~1620)을 가리킨다. 김용의 자는 道源, 호는 雲川이며, 학봉 김성일의 조카로, 1590년(선조 23) 문과 급제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켰으며, 병조참의·여주목사 등을 역임했다. 1892년(고종29)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는데, 편지의 본문에서 이와 관련된 행사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발신자 김흥락의 본관은 義城, 자는 繼孟, 호는 西山이다. 학봉 김성일의 嫡長孫으로, 이황·이상정·류치명으로 이어지는 근세 영남유림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명이다. 김흥락은 遺逸로 천거되어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諸訓集說要覽』·『初學箴』·『畏天說』· 『拙守要訣』·『主一說』 등을 지었고, 문집으로 『西山集』이 있다.
수신자는 미상이다. ‘槐濠 燕几下 侍人’이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영해 괴시마을의 영양 남씨에게 보낸 것으로 짐작된다. 濠隱 南興壽(1813~1899)가 마을에 槐濠書塾을 건립하여 마을 자제들의 공부를 지원했는데, 편지는 괴호서숙으로 보낸 것이다.
남흥수의 손자 南朝洼(1867~1918)는 김흥수의 문인이고, 그 밖의 손자들도 김흥수의 문하에 출입했다. 영양남씨와 의성김씨는 오랫동안 학문적인 관계망을 이어왔으며, 혼반이 형성되었다. 당시 남흥수는 의성김씨 金麟洛을 사위로 맞이했고, 손자 南朝鷹도 의성김씨와 혼인시키는 등 중첩적인 혼인을 통해 두 성씨 사이의 교유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였다. 이 편지도 두 성씨의 학문적 교류의 일면을 보여준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