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12월 6일, 金興洛이 상대방이 부탁한 글이 늦어 미안하다고 하며 빠른 시일 내에 써줄 것을 약속하는 편지
1891년 12월 6일, 金興洛이 상대방이 부탁한 글이 늦어 미안하다고 하며 빠른 시일 내에 써줄 것을 약속하는 편지이다.
편지는 안부로 시작된다. 몇 년 동안 소식이 막혀 오랫동안 그리워했는데, 상대방이 초여름에 편지를 보내주어 목이 마른 듯한 회포에 조금 위로가 되었으나 궁벽한 곳에 살아 인편이 없어 답장을 보내지 못해 죄송하다고 했다. 상대방이 멀리서 하인을 보내고 게다가 손수 쓴 편지를 보내어 덕스러운 뜻으로 간곡하게 돌보아 주는 정성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했다.
김흥락은 편지를 통해 저물어가는 한해에 한가하게 수양하고 계시는 상대방의 체후가 시절에 따라 몸을 잘 보중하고 노년에 공부를 하고 아울러 道義를 닦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우러러 축하드리는 뒤 끝에 蘇軾과 같은 본인은 응당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탄식이 이어졌다고 했다. 김흥락은 궁벽한 마을에 병으로 칩거하고 쇠약함도 미치어 생각이 없는 사람일 뿐이라고 했다.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벗들이 그릇되게 서로 추켜세워 상대방의 귀에까지 들려 분수에 넘는 칭찬과 실정에 맞지 않는 말이 있으니 스스로가 위축되어 편안하지 않다고 했다. 만약 상대방이 자신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면 부풀려진 말을 버리고 실제로써 일을 처리하고 본인이 미칠 수 있는 바를 헤아려 상대방이 그것을 실행한다면 자신의 마음이 편해서 상대방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해주시길 거듭 바란다고 했다.
편지의 본론에 해당하는 내용이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상대방이 부탁한 글은 노둔하고 방해받는 일이 많아서 아직까지 짓지 못했다고 했다. 상대방이 보내준 편지를 받으니 부끄럽고 죄송하다고 했다. 나중에 마땅히 틈을 내어 멀지 않은 시기에 부탁한 글을 쓰려고 했으나 상대방이 일부러 심부름꾼을 보내주어 매우 미안하다고 했다. 마침 재계 중이라 장황하게 쓸 겨를이 없다고 하면서 송구영신에 더욱 自重自愛하여 많은 복을 받길 기원하면서 편지를 마무리했다.
발신자 김흥락(1827∼1899)의 본관은 義城, 자는 繼孟, 호는 西山이다. 학봉 김성일의 嫡長孫으로, 이황·이상정·류치명으로 이어지는 근세 영남유림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명이다. 김흥락은 遺逸로 천거되어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諸訓集說要覽』·『初學箴』·『畏天說』·『拙守要訣』·『主一說』 등을 지었고, 문집으로 『西山集』이 있다. 수신자는 미상이지만, "槐濠 靜几下 下執事"란 표현으로 미루어 濠隱 南興壽(1813~1899) 등이 괴시마을에 건립한 槐濠書塾 앞으로 보낸 것으로 짐작된다.
남흥수의 손자 朝洼(1867~1918)는 김흥락의 문인이고, 그 밖의 손자들도 김흥락의 문하에 출입했다. 영양 남씨와 의성 김씨는 오랫동안 학문적인 관계망을 이어왔으며, 혼반이 형성되었다. 남흥수는 의성 김씨 金麟洛을 사위로 맞이했고, 손자 朝鷹도 의성 김씨와 혼인시키는 등 중첩적인 혼인을 통해 두 성씨 사이의 교유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였다. 사족들은 함부로 문자를 주고받지 않는데, 영양 남씨가 당시 영남의 명유였던 김흥락에게 글을 부탁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교분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