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1월 27일, 李敦禹 외 8인이 葛庵 李玄逸선생의 강학건물인 南嶽書堂을 보수하는 일로 그동안 진행된 사항을 알리고, 또 물심양면으로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수신미상에게 보내는 편지
1883년 1월 27일에 李敦禹(1807~1884) 외 8인이 葛庵 李玄逸선생의 강학건물인 南嶽書堂을 보수하는 일로 수신미상에게 그동안 진행된 사항을 알리고, 또 물심양면으로 도와달라는 내용의 편지이다.
南嶽書堂은 곧 葛庵先生께서 도학을 강습한 곳으로서 하나의 수석과 한 포기 초목도 선생께서 남기신 광영을 입지 않은 것이 없는 곳인데도 수년간 도의가 퇴락하여 예전의 모습을 문득 회복하기 어렵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근래 본댁으로부터 재빨리 집을 수리하기를 도모하여 서당이 옛 모습을 찾았다 하였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 수 백년 사이에 아직도 정성을 본받아 베풀어 설행하는 곳이 없으니 세상의 여론을 살펴보면 실로 흠되는 일인데 선생님의 고을로부터 사림들이 이미 계를 닦아 분배하였다는 소식을 들었고. 서로 상의하여 재력에 따라 도와서 유학을 진흥시키는데 영광이 있게 된다면 천만번 다행이라 하였다.
발급자 가운데 몇 명의 인물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돈우는 본관은 韓山, 자는 始能, 호는 肯庵이다. 아버지는 李秀應,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생원 權義度의 딸이다. 大山의 현손이고, 류치명의 문인이다. 1850년 문과 급제 하였고 이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저서에는 『肯庵集』이 있다.
李明稷(1809~?)은 본관은 한산, 자는 德馨이다. 안동에서 주거하였으며, 류치명의 문인이다. 金敬樞(1806~1886)는 자는 以直, 호는 知非庵이다. 아버지는 觀洙이고, 안동에서 주거하였다. 李秉遠의 문인이며, 副護軍을 지냈다.
金道和(1825~1912)는 조선 말기의 학자이며 의병장이다. 본관은 義城, 자는 達民, 호는 拓菴이다. 안동 출신이며 若洙의 아들이다. 李敦煜(1824~1899)은 본관은 韓山, 자는 致精, 호는 企庵이다. 秀得의 아들이며, 외조는 趙應洙, 재종조 秉遠에게 배웠다. 1876년 문과에 급제 한 이후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등의 관직을 역임한 이력이 있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