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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금양학단(錦陽學壇)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8+KSM-XF.1882.4717-20160630.01142570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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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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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금양학단, 영해향중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
작성시기 1882
형태사항 크기: 38.3 X 72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덕 인량 재령이씨 갈암종택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82년 금양학단(錦陽學壇) 서간(書簡)
1882년 12월 7일, 김규락(金奎洛) 외 12인이 금양초당(錦陽草堂)의 중수를 계기로 학계를 창설하자고 제안하기 위해 영해향중으로 보낸 연명 편지이다.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강학소인 금양초당을 중수하면서 학계를 결성하자는 의논을 낸 일에 대해 자신들도 참여하고 싶다고 하면서, 인근의 사림이 모인 자리에서 의논하여 물자를 분배한 뒤 계첩에 이름을 올리고 시행할 때를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이 일이 성사되는 것은 상대방 쪽에서 추진하는 것에 달려있으니 모일 날짜를 잡아 알려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1차 작성자 : 서진영

상세정보

1882년 12월 7일, 金奎洛 외 12인이 錦陽學壇에서 영해향중으로 보낸 연명 편지
1882년 12월 7일, 金奎洛 외 12인이 錦陽學壇에서 영해향중으로 보낸 연명 편지이다.
주요 내용은 葛庵 李玄逸의 강학소인 錦陽草堂의 重修를 계기로 이곳을 선생의 유덕을 기리고 지켜나갈 장소로 삼고 학계를 창설하자고 제안하였다. 금양은 지금의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이다.
선생이 南嶽에서 강도하여 先聖을 잇고 後學을 열어 주었는데, 이미 세상을 떠난 지 백여 년이라 하고, 후학으로서 그 遺澤에 모여 그 글을 강론하고 그 도를 밝히는 일이야말로 그 道를 높이고 德에 보답하는 일이 될 것이라 서두를 열었다. 그런데 봄여름 사이에 초당을 重修하고 현판을 새로 달며, 이를 계기로 학계를 결성하자는 의논을 내었다 하니, 그 계획의 상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뜻을 함께하는 처지로서 자신들도 참여하고 싶다고 하였다. 이에 오늘 인근의 士林이 모인 자리에서 의논하여 먼저 물자를 분배한 후 차례로 계첩에 이름을 올리고, 貴鄕에서 시행할 때를 기다리겠음을 알렸다. 이는 선생이 돌아가신 후 100여 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선생을 위하여 單設로라도 신위를 모시고 받드는 곳이 없으니 이것이 우리 儒林의 欠典이 되며 후학의 송구함이 되기 때문이라 하였다. 다만 이 일이 성사되는 것은 귀향에서 속히 추진하는 데 달려있으나, 기일을 정하여 본당에 한 번 모여 稧帖을 닦고 規約을 정하는 일이 없을 수 없다 하고 귀향에서 먼저 초봄의 볕이 따뜻한 날로 모일 날짜를 잡고 회시해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金奎洛(1813~1890, 본관은 義城, 자는 大奎, 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 兼五衛將), 金常壽(1819~1906, 본관은 의성, 자는 季恒, 호는 芝廬), 柳基鎬(1823~1886, 본관은 全州, 자는 鞏甫, 호는 石隱), 金鎭誠(1820~1883, 본관은 의성, 자는 純若, 호는 賁溪, 제산 김성탁의 주손), 金宗鎬, 柳建鎬(1826~1903, 본관은 전주, 자는 彛執, 호는 石隱), 權進博(1827~1890, 본관은 안동, 자는 周伯, 호는 河南, 또는 滄溪), 金城鎭(1822~1886, 본관 의성, 자는 禹伯, 호는 達澗), 柳健欽(1825~1891, 본관은 전주, 자는 剛仲, 호는 廣林), 權祚永, 金宗洛(1827~1887, 본관은 의성, 자는 希源, 호는 芝墅), 柳廷弼, 柳東植 等 13명이 연명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승균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82년 금양학단(錦陽學壇) 서간(書簡)

寧海鄕中 僉座 執事。
錦陽壇會中 謹候狀。 謹封。
伏惟臘寒
僉體動止萬重。仰慰區區之至。生等强力衰骸。來會此地。荒壇雲
物。自不禁羹墻之思。因竊伏念昔我
先生講道南嶽山中。繼開之功。爲百世宗師。而今其遺墟。溪山泉石。
莫非杖屨之留跡。草樹雲烟。尙帶道德之光輝。而巋然之亭。又是
東魯之靈光。然東南行過之人。不免興愴於葵麥荒廢之感者。幾百
年哉。生等。以爲尊衛之有待於天者。固不可以人力如何。而若夫寓慕於
遺躅之地。時會登臨。講其書明其道。則在後學崇奉之義。塵
刹之報。庶或爲萬一之效矣。曾伏聞春夏之間。重修草堂。軒楣更
新。顧此正道衰微。異學充塞之日。若將吾黨小子之升堂入室之更
有其地也。何等斯文之幸耶。繼又聞貴鄕僉君子倡發修稧之議。
雖未承其規劃之詳。而其在同志之列。仰歎欽聳。不啻自其口出者。而
彛性所發。又不欲本鄕之專美。所以有今日之會。先排公物。次收稧
帖。略成措劃。以待貴鄕施設之時。蓋
先生易責後百餘䄵。尙今無爲。先生單設崇衛之所者。大是吾
林之欠典。後人之追悚。何幸此論之發於此時也。第念此等事擧。貴
在速就。而不可無指期一會於本堂。爲修帖定規之事。伏望自貴
鄕量定會日於初春暖景之時。因便回示。則生等諸門老成。各一
二人趨赴末席。共修勝事。周旋始終。爲不外於崇衛之役。謹拜
狀以請。伏惟
僉察。
壬午臘月初七日。金奎洛 金常壽 柳基鎬 金鎭誠 金宗鎬 柳建鎬 權進博 金城鎭 柳健欽 權祚永 金宗洛 柳廷弼 柳東植 等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