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12월 7일, 金奎洛 외 12인이 錦陽學壇에서 영해향중으로 보낸 연명 편지이다.
주요 내용은 葛庵 李玄逸의 강학소인 錦陽草堂의 重修를 계기로 이곳을 선생의 유덕을 기리고 지켜나갈 장소로 삼고 학계를 창설하자고 제안하였다. 금양은 지금의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이다.
선생이 南嶽에서 강도하여 先聖을 잇고 後學을 열어 주었는데, 이미 세상을 떠난 지 백여 년이라 하고, 후학으로서 그 遺澤에 모여 그 글을 강론하고 그 도를 밝히는 일이야말로 그 道를 높이고 德에 보답하는 일이 될 것이라 서두를 열었다. 그런데 봄여름 사이에 초당을 重修하고 현판을 새로 달며, 이를 계기로 학계를 결성하자는 의논을 내었다 하니, 그 계획의 상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뜻을 함께하는 처지로서 자신들도 참여하고 싶다고 하였다. 이에 오늘 인근의 士林이 모인 자리에서 의논하여 먼저 물자를 분배한 후 차례로 계첩에 이름을 올리고, 貴鄕에서 시행할 때를 기다리겠음을 알렸다. 이는 선생이 돌아가신 후 100여 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선생을 위하여 單設로라도 신위를 모시고 받드는 곳이 없으니 이것이 우리 儒林의 欠典이 되며 후학의 송구함이 되기 때문이라 하였다. 다만 이 일이 성사되는 것은 귀향에서 속히 추진하는 데 달려있으나, 기일을 정하여 본당에 한 번 모여 稧帖을 닦고 規約을 정하는 일이 없을 수 없다 하고 귀향에서 먼저 초봄의 볕이 따뜻한 날로 모일 날짜를 잡고 회시해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金奎洛(1813~1890, 본관은 義城, 자는 大奎, 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 兼五衛將), 金常壽(1819~1906, 본관은 의성, 자는 季恒, 호는 芝廬), 柳基鎬(1823~1886, 본관은 全州, 자는 鞏甫, 호는 石隱), 金鎭誠(1820~1883, 본관은 의성, 자는 純若, 호는 賁溪, 제산 김성탁의 주손), 金宗鎬, 柳建鎬(1826~1903, 본관은 전주, 자는 彛執, 호는 石隱), 權進博(1827~1890, 본관은 안동, 자는 周伯, 호는 河南, 또는 滄溪), 金城鎭(1822~1886, 본관 의성, 자는 禹伯, 호는 達澗), 柳健欽(1825~1891, 본관은 전주, 자는 剛仲, 호는 廣林), 權祚永, 金宗洛(1827~1887, 본관은 의성, 자는 希源, 호는 芝墅), 柳廷弼, 柳東植 等 13명이 연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