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 7월 28일, 喪中인 姜濟가 상대의 안부를 묻고 근황을 전하기 위해 楮谷에 사는 사돈에게 보낸 편지
1880년 7월 28일에 喪中인 姜濟(1826~1919)가 상대의 안부를 묻고 근황을 전하기 위해 楮谷에 사는 사돈에게 보낸 편지이다.
서두에 稽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발급자가 喪中임을 표시하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오직 그리운 마음만 수고롭다고 하며 서찰을 시작하여, 이미 가을 서늘함이 생겨나는데 고요히 덕을 기르시는 상대방의 안부와 나머지 식구들의 안부를 묻고, 孫婦는 충건하게 잘 지내는지 어여쁜 모습이 눈에 삼삼하다고 하며 그리운 마음을 담아 묻고 있다.
발급자의 근황으로는, 親喪을 당한 자신은 계절이 변하도록 완악한 목숨을 부지하며 원통한 눈물만 흘린다고 하고, 월초에 돌아온 아들은 科擧라는 유혹에 흔들리고 있어 한탄스러울 뿐이며, 손자는 더위를 먹은 증상이 아직도 줄어들지 않아 걱정스럽다고 전하고 있다. 이어 稚崇의 안부를 물으며 그리운 마음을 적었다. 마지막으로 免新禮에 대한 날짜가 9월부터 12월 사이에 모두 마땅하지 않으니 그쪽의 대방가에게 물어보는 것이 어떠냐고 묻고 있다. 황망함으로 두서가 없으니 잘 살펴주길 바란다고 마무리 하고 있다.
강제의 본관은 晉州, 자는 美世, 호는 桂下이다. 陶隱 姜恪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姜鉉이다. 奉化 法田에 살았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만년에 蔭仕로 恭陵參奉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稚崇은 李壽岳(1845~1927) 字인데, 致崇, 또는 穉崇이라고도 하였다. 호는 于軒이다. 存齋 李徽逸의 8세손으로 영해에 살았다. 1886년 대원군의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당론으로 인하여 4년간 吉州에 귀양을 갔다. 1896년 을미의병 때는 영해의진의 의병장으로 거의하였다가 고종의 해산령으로 해산하였다.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