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3월 22일, 柳基鎬가 槐市로 보낸 편지
1872년 3월 22일 朴谷의 柳基鎬(1823~1886)가 槐市로 보낸 서찰이다.
서찰을 받고 수신인의 안부가 여러 가지로 좋다하니 위안이 되고 기쁜 마음이라 적고 있다. 자신은 그 사이 손가락에 난 종기로 고통을 받다가 근래에 겨우 나았으나 아직도 구부리기가 어렵다고 하고, 자신의 숙부는 병세가 심해지지는 않았으며, 집안에는 걱정거리들로 머리가 복잡하다고 근황을 전하고 있다. 金文若 어른의 喪事로 인한 상심에 위로의 말을 전하고, 얼마 전에 訂窩 어른도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우리 사림이 텅 비었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책을 만들 종이는 이미 구해두었는데 아직까지 운반해 오지 못하고 있어 죄송하다고 적고 있다. 마침 농사철이라 바쁘지만 집안에 가마편이 있으니 그 편에 부쳐올 수 있는지 묻고 있다.
발급자 류기호는 본관이 전주, 자는 鞏甫, 호는 石隱이다. 안동의 朴谷에 거주하였다. 壽靜齋 鼎文의 손자로 定齋 柳致明의 문인이다. 가학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전심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1871년 嶺南儒疏의 疏首로 대원군의 서원훼철을 반대하다가 강원도 金化에 유배되고 다시 평안도 宣川에 이배되었다. 이 때 지은 《客日隨錄》 4권2책과 《문집》6권3책이 전한다.
金文若은 金鎭明(1813~1872)의 자이다. 본관은 의성, 호는 吉軒이다. 定齋 柳致明의 문인으로 문학과 행실이 들어났으며 1844년(헌종10)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출사를 단념하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 서찰을 쓴 1872년에 세상을 떠났다.
訂窩는 金垈鎭(1800∼1871)의 호이다. 본관은 의성, 자는 泰叟이다. 1840년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이후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雲川 金涌의 가훈인 "窮不失意達不離道" 8자를 벽에 붙이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1차 작성자 : 김승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