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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김진명(金鎭明)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8+KSM-XF.1872.4717-20160630.071425701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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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김진명, 남흥수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872
형태사항 크기: 18.4 X 36.5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덕 괴시 영양남씨 괴시파 영감댁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72년 김진명(金鎭明) 서간(書簡)
1872(고종 9)년 1월 24일에 김진명(金鎭明)이 상대에게 문집 간행이 끝나면 한번 만나 쌓인 회포를 풀자는 편지이다. 상대가 말한 비석의 일은 우곡이 상사로 인해 정신이 없어 아직 못하고 있으며, 다음 달 초에 진행될 것 같다고 하였다. 문집 간행도 다가오는 그믐쯤에 끝날 것 같으니 이때에 서로 만자고 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선주

상세정보

1872(고종 9)년 1월 24일에 金鎭明(1813~1872)이 상대에게 문집 간행이 끝나면 한번 만나 쌓인 懷抱를 풀자는 편지
1872(고종 9)년 1월 24일에 金鎭明(1813~1872)이 상대에게 문집 간행이 끝나면 한번 만나 쌓인 懷抱를 풀자는 편지이다.
상대의 편지를 받고, 또 상대의 아들의 방문에 상대의 안부를 알고는 위로가 된다고 하였다. 김진명 자신은 服中에 있는 상황을 전하였다. 자신은 12월 15일에 雨谷의 조카며느리가 세상을 떠나, 아이들이 울어도 젖먹일 사람이 없어 季君의 부자가 몹시 슬퍼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 장례를 21일에 치렀음을 알리고, 자신의 며느리도 살림살이의 고단함으로 늙은 모습의 며느리가 되었다고 하였다.
아울러 泰山의 호랑이가 내려와 府吏와 營校가 자주 고을로 와서 살피고 있으며, 한 번의 난리가 난 것처럼 떠들썩하다고 하였다. 상대가 말한 비석의 일은 우곡이 喪事로 인해 정신이 없어 아직 못하고 있으며, 다음 달 초에 진행될 것 같다고 하였다. 문집 간행도 다가오는 그믐쯤에 끝날 것 같으니 이때에 서로 만나서 회포를 풀자고 하였다.
김진명의 字는 文若, 號는 吉軒이며 定齋 柳致明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44년(헌종 10) 증광시 생원 3등 22위로 합격하였으나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문학에 뛰어났고, 향리에서 행동이 바른 것으로 칭송을 들었다. 조부는 金聖欽으로 호가 臥溪이며, 1728년(영조 4) 李麟佐李亮信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었다. 아버지는 金繼壽이다. 부인은 3명을 맞이했는데 안동권씨 權載書 딸과 단양우씨 禹鍾恒의 딸, 안동권씨 權永老의 딸이다. 그의 저서로는 『吉軒集』이 있다.
1차 작성자 : 박경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72년 김진명(金鎭明) 서간(書簡)

謹拜謝狀。
濠上 服座 執事。 省式謹封。
省式。望間。轉承惠訊。繼而賢器左訪。
荐致情問。施不見報。而不輟如是耶。且披
且詢。敬審
靜養氣力履端增庇常若。同堂
面面珍吉。種種慰賀。實叶遠忱。服弟。
餘戾未已。臘望又遭雨谷姪婦寃慘。
不但其淑質可惜。季君父子所遭。政是人
理之極。而幼孩啼叫。乳養無人。令人氣
短。用是餞迓懷事。只從悲悴中度了。
而埋寃在卄一才行。家累種種不健。婦阿
癃然作一老婦。又未免井臼之勞。見甚憫
且憐也。奈何。怪沴之四圍。聞極戒心。而泰
山虎又下鄙邑。生靈將靡所止戾。而府吏
營校。鱗次來督。便同一番亂離。詳在
賢器口達。碑石事。季君所罹如右。未暇
抽進。方以來初晉去云。印集了在來晦
云。伊時敢望御者枉顧一討。未知如何。
吾輩俱是準六之人。及今無會合之日。
更安有前期耶。幸圖之。切望切望。賢器
竊欲挽留多日。而以道路有拘期。則竝內行。玆
未苦挽。悵缺深矣。餘。撓甚不宣。伏惟
回照。
■■(辛未)壬申正月念四日。査弟朞服人 金鎭明 拜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