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고종 8)년 3월 10일에 金鎭明(1813~1872)이 南興壽(1813~1899)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活刊에 대한 사정을 말하고, 종이를 구해달라고 요청하는 편지
1871(고종 8)년 3월 10일에 金鎭明(1813~1872)이 南興壽(1813~1899)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活刊에 대한 사정을 말하고, 종이를 구해달라고 요청하는 편지이다.
먼저 雨谷에서 부고를 알리는 심부름꾼을 통해 상대의 편지를 받아보았고, 지난 달 義城에서 돌아와 보니 상대의 아들이 편지를 전하고 갔으나, 서로 보지 못하고 보낸 것이 아쉽다고 하였다. 따뜻한 봄날에 상대와 가족들, 특히 咸兄이 구류된 사건은 해결이 되었는지 등의 안부를 물었다. 김진명 자신은 弟嫂가 병으로 죽어 막냇동생이 늙은 나이에 더 슬퍼한다고 하였다. 그 장례식을 다음달 6일에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 而遠[金鎭大(1819~1885)] 집의 장례식이 이번 달 20일에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李嬌도 건강하지 않아 복통으로 의사를 물어 약을 먹지만 효험이 없다고 집안의 안부를 전하였다.
본론으로 活刊의 일은 여러 차례 상대의 지시를 받았으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이미 右人에게 주었는데도, 말과 실제가 달라졌으니, 스스로 무덤에 빠진 꼴이라고 하였다. 우인 또한 이 일을 믿고 다른 곳의 부탁을 물리쳤는데도 기한이 늦어졌으니, 특별한 연고가 있어 그러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속할지 여부를 알려달라고 하였다. 자신이 옴에 걸렸던 몸 상태가 좋아졌으니, 상대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과거의 날짜가 다가왔고, 서울 소식에 특별하게 합격자를 많이 뽑는다고 하면서, 상대가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하였다. 마지막으로 종이가 귀하여 돈 한 꿰미를 보내니 草紙 1軸을 구입해 달라고 하였다.
김진명은 본관은 義城이고, 자는 文若, 호는 吉軒이다. 부친은 金繼壽인데, 김진명은 장남이고 동생 金鎭誠(1820~1883)은 金潤壽(1782~1854)에게로 출계하였다. 본 편지의 수신자는 남흥수로서 본관은 英陽이며, 자는 穉猶, 호는 濠隱이다. 부친은 南景适, 조부는 南澤萬이다. 김진명의 첫째 아들 金麟洛(1833~1888)이 남흥수의 따님인 英陽南氏(1833~1886)와 혼인하였다.
1차 작성자 : 박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