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고종 8)년 4월 11일에 金鎭明(1813∼1872)이 민란이 일어난 것에 대해 걱정을 전하고, 상대가 부탁한 農木을 보내면서 紙軸을 꼭 사달라고 부탁하는 편지
1871(고종 8)년 4월 11일에 金鎭明(1813∼1872)이 민란이 일어난 것에 대해 걱정을 전하고, 상대가 부탁한 農木을 보내면서 紙軸을 꼭 사달라고 부탁하는 편지이다.
바닷가에서 일어난 소요가 날마다 심해진다고 하는데 정확한 소식을 듣지 못해 근심된다고 하였다. 상대의 재종 조카로 인해 상대의 편지를 받고는 위로가 된다고 하면서 복중에 있는 상대의 안부를 물었다. 김진명 자신은 龍城에서 酒泉을 돌아 겨우 집에 돌아왔다가, 다시 雨谷에 상여를 따라갔고, 6일 저녁에 돌아와서 피곤함을 떨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것이 더 낫는 것 같다고 사정을 전하였다. 아울러 며느리와 손녀들도 잘 있다고 전하였다.
서책을 活印하는 일에 있어 잡비와 궁벽한 봄에 생활비를 생각해야 하므로 반값만을 20일 이전에 자신에게 바로 보내달라고 하였다. 虎院의 撤關이 어제 보고는 탄식할 만하다고 하였다. 영남의 좋은 지역에 있는 서원의 훼철에 대해, 중국 명나라 錢唐이 옷을 벗고 화살을 대항한 것처럼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실정이 안타깝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보면 대원군의 서원훼철로 인해 당시에 호계서원이 훼철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가뭄이 심해 모종을 이앙할 수 없음이 걱정된다고 하였다. 서책을 간행한 후에 교정에 대해서는 김진명의 동생이 담당할 것인데, 아울러 상대도 한번 방문해 달라고 전하는 내용이다. 추신으로 종이가격이 비싸므로 초지를 사서 보내달라고 하였다.
김진명은 본관은 義城이고, 자는 文若, 호는 吉軒이다. 부친은 金繼壽인데, 김진명은 장남이고 동생 金鎭誠(1820~1883)은 金潤壽(1782~1854)에게로 출계하였다. 본 편지의 수신자는 남흥수로서 본관은 英陽이며, 자는 穉猶, 호는 濠隱이다. 부친은 南景适, 조부는 南澤萬이다. 김진명의 첫째 아들 金麟洛(1833~1888)이 남흥수의 따님인 英陽南氏(1833~1886)와 혼인하였다.
1차 작성자 : 박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