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고종 7)년 12월 16일에 金鎭明(1813∼1872)이 사돈에게 상대의 형제가 죽은 것에 대해 위로하고, 19일의 모임에 참석할지 여부를 묻는 편지
1870(고종 7)년 12월 16일에 金鎭明(1813∼1872)이 사돈에게 상대의 형제가 죽은 것에 대해 위로하고, 19일의 모임에 참석할지 여부를 묻는 편지이다.
부고를 전하는 심부름꾼이 돌아간 후에 다시 소식이 없었는데, 뜻밖에 상대의 편지를 받고는 감사하다고 하였다. 상대가 服中에 잘 지내는지 물으면서 형제를 잃은 슬픔이 매우 심할 것이라 하였다. 김진명 자신은 잘 지내고 있고, 疥癬이 가족들에게 모두 옮아 걱정된다고 전하였다.
臨川의 上䟽하는 儒者들이 당일에 형벌을 받고 유배지로 간 것에 대해 그 곤액이 매우 심하다고 걱정하였다. 자신의 막내가 䟽錄에 참여하였다가 돌아와서 이번 달 19일에 모임을 크게 열 것이라고 모든 유생들에게 참석할 것을 일일이 알렸는데, 이에 대해 상대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그 의향을 물었다. 이것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대한 대처로 보인다. 癡集을 간행하는 일을 상대가 도맡아서, 右人에게 부탁하는 것이 늦어지면 낭패가 될 것이니, 빨리 다시 부탁하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새해를 맞아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하는 내용이다.
김진명은 본관은 義城이고, 자는 文若, 호는 吉軒이다. 부친은 金繼壽인데, 김진명은 장남이고 동생 金鎭誠(1820~1883)은 金潤壽(1782~1854)에게로 출계하였다. 본 편지의 수신자는 남흥수로서 본관은 英陽이며, 자는 穉猶, 호는 濠隱이다. 부친은 南景适, 조부는 南澤萬이다. 김진명의 첫째 아들 金麟洛(1833~1888)이 남흥수의 따님인 英陽南氏(1833~1886)와 혼인하였다. 癡集은 金德五(1680~1748)의 문집인 『癡軒先生文集』으로 보인다. 南甲壽, 南公壽, 金岱鎭 등 영남사림들이 주축이 되어 1870년에 간행하였다. 여기서 右人은 『치헌집』을 전체적인 교정을 맡은 사람으로 보인다.
1차 작성자 : 박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