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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김진명(金鎭明)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8+KSM-XF.1867.4717-20160630.07142570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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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김진명, 남흥수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867
형태사항 크기: 22.6 X 45.6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덕 괴시 영양남씨 괴시파 영감댁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67년 김진명(金鎭明) 서간(書簡)
1867(고종 4)년 8월 29일에 김진명(金鎭明)이 사돈 남흥수(南興壽)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면서 모든 지역이 풍년인데, 상대방 쪽만 잘 되지 않았음을 걱정하였다. 또 자기 쪽도 작황이 작년만 못하여 곡물가격은 싸지고 인심이 각박해져 암행어사가 사부들을 잡아가는 것이 지극해졌다고 하였다. 종이를 사서 보내달라고 하는 편지이다.
1차 작성자 : 김선주

상세정보

1867(고종 4)년 8월 29일에 金鎭明(1813∼1872)이 사돈 南興壽(1813∼1899)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종이를 사서 보내달라고 하는 편지
1867(고종 4)년 8월 29일에 金鎭明(1813∼1872)이 사돈 南興壽(1813∼1899)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종이를 사서 보내달라고 하는 편지이다.
편지의 서두에 일전에 상대로부터 두 통의 편지를 받았음에도, 인편이 없어 답장을 할 수 없었기에 감사와 부끄러움이 교차한다고 하였다. 재종질이 돌아와 상대방 집안의 안부를 알 수 있어 위로가 된다고 하였다. 김진명 자신은 요통과 가래가 생기는 병으로 몸져 누워있지만, 나머지 眷率들은 모두 무탈하다고 하였다. 특히 興嬌가 어미를 그리는 마음이 얼굴에 드러나지만, 어미의 직분을 잘 대신하고 있어 어른스럽다면서 칭찬하였다.
본론에서는 당해 농사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모든 지역이 풍년인데, 상대방 쪽만 잘 되지 않았음을 걱정하였다. 또 자기 쪽도 작황이 작년만 못하여 곡물가격은 싸지고 인심이 각박해져 암행어사가 士夫들을 잡아가는 것이 지극해졌다고 하였다. 연내로 상대에게 방문해 달라고 하였으나, 상대가 움직일 기력이 없다하여 자신이 결국 가게 되겠다면서 농담을 하였다. 李兄이 행차한다는 소식이 없으니, 같이 만나면 기이한 일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전에 부탁했던 종이를 從姪이 돌아오는 편을 보내달라고 하였다.
김진명은 본관은 義城이고, 자는 文若, 호는 吉軒이다. 부친은 金繼壽인데, 김진명은 장남이고 동생 金鎭誠(1820~1883)은 金潤壽(1782~1854)에게로 출계하였다. 본 편지의 수신자는 남흥수로서 본관은 英陽이며, 자는 穉猶, 호는 濠隱이다. 부친은 南景适, 조부는 南澤萬이다. 김진명의 첫째 아들 金麟洛(1833~1888)이 남흥수의 따님인 英陽南氏(1833~1886)와 혼인하였다.
1차 작성자 : 박경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67년 김진명(金鎭明) 서간(書簡)

謹拜候上。 謹封。
日前。再度辱問。沒便稽謝。感
與愧幷。再從姪還。詢審秋涼
棣床動止衛護。允位諸況珍吉。
婦兒曁慶嬌。蒙庇安好。慰
賀萬萬不任遠忱。査弟。近有小出入。
偶得腰疼挾痰之祟。伏枕叫
苦。餘眷保無他虞。興嬌思母之心。
往往發於言貌。然能代供渠母之職。
已有成人樣子。可愛亦可喜也。年
事。八路同豊。貴庄何獨不然。此間
亦未見勝似去年。而火田則未可
以稱稔。但穀價日淺。而人心漸覺遷
薄。至於繡啓之網羅士夫而極矣。
只當闔門屛息。以全軀命而已。年
來竊擬坐屈吾兄。而畢竟無動
得氣力。早晏間。弟之一行。
欲已而不已。兄
之屈人之力。何其
壯也。呵呵。李兄
行聲竟寂云。
會待弟行相
値。則正是奇
事。然如許好
事。吾輩安可
必得耶。紙地
之托。幸不忘耶。
無失從侄歸便。如
何如何。餘。都留
不宣。伏惟
崇照。
丁卯八月念九日。査弟 金鎭明 拜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