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9년 10월 13일, 柳致明이 상대방에게 簡幅 다섯 폭을 보내면서 삼종씨 노형이 바라는 바는 본인이 감당할 바가 아니어서 부응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함께 자세한 안부 인사도 전하는 편지
1859년 10월 13일에 柳致明(1777∼1861)이 상대방에게 簡幅 다섯 폭을 보내면서 삼종씨 노형이 바라는 바는 본인이 감당할 바가 아니어서 부응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함께 자세한 안부 인사도 전하는 편지이다.
상대방이 여름에 보내준 편지를 읽고 본인을 잊지 않고 생각해 주는 뜻을 알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 지금까지 간절하다고 했다. 돌아가는 인편이 없어 아직까지 답장을 쓰지 못해 부끄럽고 한스러운 마음 많다고 했다. 가을 이후 상대방의 靜養하는 가운데 일상생활이 만 가지로 좋은지, 상대방의 부인과 집안 식구들의 안부는 고루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류치명과 가족의 소식을 전했다. 류치명은 걷잡을 수 없이 가는 세월에 날로 쇠퇴하고, 근래에 또 從弟 天弼의 상을 당해 情私가 비통하다고 했다. 아이의 병은 아직 염려가 놓이지 않고, 또 아이 柳止鎬(1825~1904)가 본가 緬禮議 때문에 매우 슬프고 애타는 마음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다시 상대방의 소식을 물었다. 從咸의 근황은 어떤지 묻고 문안을 드려야 하나 이번 인편에도 답장을 쓰지 못했다고 했다. 마침 누군가 보내준 簡幅이 있어 다섯 폭을 드린다고 하면서 사소하고 또 늦어 부끄럽다고 했다. 삼종씨 노형은 그리워하던 차에 뵙게 되니 매우 다행이라고 했다. 다만 노형이 바라는 것은 정신이 흐리멍덩한 본인이 감당할 바가 아니니, 아마도 그의 생각에 부응할 수 없을 것아 두렵다고 했다.
발신자 류치명의 본관은 全州, 자는 誠伯, 호는 定齋이다. 아버지는 柳晦文이고, 어머니는 한산 이씨이며, 외증조부는 李象靖이다. 1805년(순조 5) 문과 급제한 뒤 공조참의 · 대사간 · 한성좌윤 ·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다가 만년에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그는 학맥으로 보면 李滉→金誠一→張興孝→李玄逸→李栽→李象靖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문하에 李震相 · 柳宗喬 · 李敦禹 · 權泳夏 · 李錫永 · 金興洛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저술로 『禮疑叢話』·『家禮輯解』·『常變通攷』·『太極圖解』 등이 있고, 문집으로 『定齋集』이 있다.
濠村의 영양 남씨는 15세 사재감 참봉 南斗遠(1610~1674)이 처음으로 터를 잡은 이후 그곳에 살게 되었다. 남두원의 아들 南鵬翼(1641~1687)은 문과 급제하여 중앙의 관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갈암 이현일, 숭재 이숭일 등을 비롯한 명현들과 교유했다. 이후 호촌의 영양 남씨는 퇴계학파 내의 학봉계와 학문적 입장을 함께 했으며, 갈암 이현일, 대산 이상정, 정재 류치명의 문하에 출입했다. 특히 濠隱 南興壽(1813~1899)는 류치명의 문인인 동시에 전주 류씨를 부인으로 맞이하기도 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