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7년 5월 11일, 안동 임하 大坪의 柳致明이 아이의 병에 사용하기 위한 磁石을 구하기 위해 영해 괴시마을의 영양 남씨에게 보내는 편지
1857년 5월 11일, 안동 임하 大坪의 柳致明(1777~1861)이 아이의 병에 사용하기 위한 磁石을 구하기 위해 영해 괴시마을의 영양 남씨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는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인편이 있은 이후 며칠이 지나니 그리운 마음 다시 간절하다고 했다. 고요히 기거하는 상대방의 건강도 잘 보존하고, 집안 식구들은 평안하며, 同堂 여러분들도 고루 잘 지내고 있는지 물었다.
류치명은 평소대로 지내고 있지만, 아이가 병으로 한결같이 아파하고 있으니 염려되고 고민된다고 했다. 아이의 병에 사용하라고 상대방이 磁石을 일부러 보내주어서 매우 감복했다고 했다. 그런데 자석의 ‘毛’와 ‘石’ 중 무엇을 써야할지 몰라 사람들에게 물어 보고 本方도 검토해 보았다고 했다. "불에 달궈 식초에 담그기를 7차례 하여 쌀처럼 부순다"고 했는데, ‘모’는 불에 구워 식초에 담그지 못하니, 필요한 것은 ‘석’ 덩어리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석’은 류치명이 살고 있는 곳에서 나는 것이 아니기에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전에 보낸 편지에서 상대방이 ‘석’도 있고 ‘모’도 있다고 했으니, ‘석’ 또한 근처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번거롭지만 간청한다고 했다.
류치명은 상대방이 했던 것처럼 곧장 하인을 보낼 여건이 되지 않아 시장으로 가는 인편을 통해 부탁했다고 한다. 믿을 만하지만 상대방이 곧장 가는 심부름꾼을 요청하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도 했다. 이전에 보내온 ‘모’는 다시 싸서 돌려보낸다고 했다.
발신자 류치명의 본관은 全州, 자는 誠伯, 호는 定齋이다. 아버지는 柳晦文이고, 어머니는 한산 이씨이다. 외증조부는 李象靖이다. 1805년(순조 5) 문과 급제한 뒤 공조참의 · 대사간 · 한성좌윤 ·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다가 만년에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그는 학맥으로 보면 李滉→金誠一→張興孝→李玄逸→李栽→李象靖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문하에 李震相 · 柳宗喬 · 李敦禹 · 權泳夏 · 李錫永 · 金興洛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저술로 『禮疑叢話』·『家禮輯解』·『常變通攷』·『太極圖解』 등이 있고, 문집으로『定齋集』이 있다.
濠村의 영양 남씨는 15세 사재감 참봉 南斗遠(1610~1674)이 처음으로 터를 잡은 이후 그곳에 살게 되었다. 남두원의 아들 南鵬翼(1641~1687)은 문과 급제하여 중앙의 관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갈암 이현일, 숭재 이숭일 등을 비롯한 명현들과 교유했다. 이후 호촌의 영양 남씨는 퇴계학파 내의 학봉계와 학문적 입장을 함께 했으며, 당대의 명유들과 교유하는 가운데 영해의 대표적인 명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편지를 작성할 당시 영양 남씨는 정재 류치명과 학문과 혼인으로 친분이 두터웠다. 濠隱 南興壽(1813~1899)는 류치명의 문인이며, 전주류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류치명이 영양 남씨에게 약 처방에 들어가는 자석을 부탁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교유에 기반한 것이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