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7년 4월 25일, 柳致明이 영해 괴시마을의 영양 남씨에게 아이 병의 처방에 사용할 자석을 구해주길 바라며 쓴 편지
1857년 4월 25일에 柳致明(1777∼1861)이 영해 괴시마을의 영양 남씨에게 아이 병의 처방에 사용할 자석을 구해주길 바라며 쓴 편지이다.
편지는 안부로 시작된다. 지난번 여러 차례 뵈었으나 유달리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는데, 이번에 문안편지를 받으니 감사함을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상대방이 보낸 문안편지를 통해 생활은 만 가지로 좋고, 집안의 모든 분들의 건강도 고름을 알게 되어 구구한 마음에 위로가 된다고 했다.
류치명은 예전처럼 지내는데 아이의 병으로 애태우고 있어 답답함을 말로 다할 수 없다고 했다. 지난날 자신이 지어준 글은 갖추어 사용하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의 말씀을 듣고, 류치명은 도리어 부끄러울 뿐이라고 했다. 재종씨의 大喪이 가까우나 정에 걸맞게 가서 위문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한스러워 하였다. 편지의 예식을 갖추지 못한 것에 대해 상대방이 살펴봐주길 바라며 편지를 맺었다.
류치명이 편지에 쓰고 싶었던 말은 추신에 담았다. 보내주신 맛난 것은 감사히 잘 받았다는 인사로 보아 상대방이 문안편지를 보내며 음식을 장만하여 함께 보낸 듯하다. 아이가 아파 약처방을 받았는데, 거기에 자석이 수십 량 정도 들어가서 그걸 구해보았으나 아직 구하지 못했다고 했다. 평해 근처 바닷가에 자석이 난다고 하니 좋은 품질로 구해 인편으로 보내주길 소망했다.
발신자 류치명의 본관은 全州, 자는 誠伯, 호는 定齋이다. 아버지는 柳晦文이고, 어머니는 한산 이씨이다. 외증조부는 李象靖이다. 1805년(순조 5) 문과 급제한 뒤 공조참의 · 대사간 · 한성좌윤 ·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다가 만년에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그는 학맥으로 보면 李滉→金誠一→張興孝→李玄逸→李栽→李象靖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문하에 李震相 · 柳宗喬 · 李敦禹 · 權泳夏 · 李錫永 · 金興洛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저술로 『禮疑叢話』·『家禮輯解』·『常變通攷』·『太極圖解』 등이 있고, 문집으로 『定齋集』이 있다.
수신자 괴시마을의 영양 남씨는 갈암 이현일, 대산 이상정, 정재 류치명, 서산 김흥락 등 17세기 이후 영남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의 집안과 혼인과 학문으로 연결되어 매우 깊은 교유관계를 지속했다. 영양 남씨는 이들에게 행장·묘갈명·기문 등을 부탁했다. 영양 남씨와 학문을 공유한 류치명은 아이가 아플 때 필요한 약재를 이들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혼인과 학문을 통해 형성된 관계망은 일상을 공유하는 기반이 되기도 했는데, 이 편지로 필요한 물건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현물경제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