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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류치명(柳致明)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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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류치명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856
형태사항 크기: 27.7 X 36.1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덕 괴시 영양남씨 괴시파 영감댁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56년 류치명(柳致明) 서간(書簡)
1856년 2월 14일, 안동 임하 대평(大坪)류치명영해 괴시(槐市)의 상대방이 부탁한 문자를 써주겠지만 늦어질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을 담아 쓴 편지이다. 류치명은 관직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노쇠한 몸으로 지친 나머지 상대방이 부탁한 것을 해줄 상황은 못 되지만 쉽게 거절할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자잘한 일을 우선 처리한 이후 상대방의 부탁에 부합할 수 있을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

상세정보

1856년 2월 14일, 류치명이 상대방이 부탁한 문자를 써주겠지만 좀 늦어질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답장 편지
1856년 2월 14일, 柳致明(1777~1861)이 상대방이 부탁한 문자를 써주겠지만 좀 늦어질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답장 편지이다.
류치명은 지난여름에 전별한 행차가 여전히 마음에 있는데, 돌아와 보니 또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어주어 매우 감사하다고 했다. 형제분들의 건강은 매우 좋고, 堂內 일가 분들의 건강은 모두 편안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매우 위안이 된다고 했다.
류치명은 사면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위로는 은혜에 감사하고 아래로는 두렵다고 했다. 본인은 감기 때문에 숨이 가빠서 해가 지나도록 괴로워했으니 스스로 가여울 뿐이라고 했다.
상대방이 부탁한 문자는 감당할 바가 아니며 더욱이 노쇠한 몸으로 돌아다녀 지친 나머지에 정신이 미치지 못할 바이지만 쉽게 거절하지 못했다고 하며, 다만 어느 때 자잘한 일을 모두 처리하여 상대방의 부탁에 부합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니, 매우 송구하다고 했다. 마지막에는 예를 갖추지 못했으니 살펴봐 달라고 했다. 추록에는 편지에서 빠트린 상대방 부인의 안부를 물었다.
발신자 류치명의 본관은 全州, 자는 誠伯, 호는 定齋이다. 아버지는 柳晦文이고, 어머니는 한산이씨이다. 외증조부는 李象靖이다. 1805년(순조 5) 문과 급제한 뒤 공조참의·대사간·한성좌윤·병조참판 등을 역임하다가 만년에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그는 학맥으로 보면 李滉→金誠一→張興孝→李玄逸→李栽→李象靖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문하에 李震相·柳宗喬·李敦禹·權泳夏·李錫永·金興洛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저술로 『禮疑叢話』·『家禮輯解』·『常變通攷』·『太極圖解』 등이 있고, 문집으로 『定齋集』이 있다.
수신자 괴시마을의 영양 남씨는 갈암 이현일, 대산 이상정, 정재 류치명, 서산 김흥락 등 17세기 이후 영남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의 집안과 혼인과 학문으로 연결되어 매우 깊은 교유관계를 지속했다. 19세기~20세기 초반 영양 남씨는 위선사업과 문중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가운데 당시 영남의 명유에게 행장·묘갈명·기문 등을 부탁했으며, 류치명에게도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글을 부탁했음을 알 수 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56년 류치명(柳致明) 서간(書簡)

槐市棣座 執事。
大坪謝狀。【謹封】

前夏餞行。尙在心曲。歸又
委書致問。感僕何言。仍審
棣履起居萬重。堂內僉候俱
安。何等仰慰。弟。蒙
宥還鄕。仰荷俯惶。且以感冒喘
喘跨歲爲苦。自憐而已。俯囑文字。
本非所堪。況在耄荒撼頓之餘。尤
是精神所不及。而不敢輒拒。謹此
拜受。但未知何時能抖擻以仰副。
甚悚。餘不宣。伏惟
下照。謹拜謝狀。
丙辰 二月 十四日。弟 柳致明 拜。

閤中連安迪否。不敢不奉問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