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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김진명(金鎭明)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8+KSM-XF.1852.4717-20160630.07142570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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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김진명, 남흥수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852
형태사항 크기: 22.3 X 43.8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덕 괴시 영양남씨 괴시파 영감댁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52년 김진명(金鎭明) 서간(書簡)
1852(철종 3)년 3월 10일에 김진명(金鎭明)이 사돈에게 종군의 과거 낙방 소식을 전하고, 한번 찾아가겠다는 것은 몸이 매여 이룰 수 없어 송구하다면서, 20일 사이에 맞추어 갈 것이지만, 확실하지 않다고 하였다. 海上에 牒을 주는 일은 조정에서 이미 논의하였다고 하지만, 아직 국왕의 윤허를 받지 못한 것으로 확실히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선주

상세정보

1852(철종 3)년 3월 10일에 金鎭明(1813∼1872)이 사돈에게 從君의 과거 낙방 소식과 海上에 牒을 주는 일에 대한 편지
1852(철종 3)년 3월 10일에 金鎭明(1813∼1872)이 사돈에게 從君의 과거 낙방 소식과 海上에 牒을 주는 일에 대한 편지이다.
상대와 상대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김진명 자신은 부친의 근력이 쇠약해져 늘 근심을 하고 있고, 자신도 쓸데없는 일로 바쁘게 지낸다고 하였다. 아이들이 천연두를 잘 이겨내고, 아들은 별 탈 없이 지낸다고 하였다.
從君이 서울에 가서 어제 돌아왔는데, 그가 과거 시험에 낙방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하였다. 영남 사람은 많이 참여할 수 없어 겨우 네 사람뿐이라고 하였다. 상대에게 한번 찾아가겠다는 것은 몸이 매여 이룰 수 없어 송구하다면서, 20일 사이에 맞추어 갈 것이지만, 확실하지 않다고 하였다. 海上에 牒을 주는 일은 조정에서 이미 논의하였다고 하지만, 아직 국왕의 윤허를 받지 못한 것으로 확실히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김진명은 본관은 義城이고, 자는 文若, 호는 吉軒이다. 부친은 金繼壽인데, 김진명은 장남이고 동생 金鎭誠(1820~1883)은 金潤壽(1782~1854)에게로 출계하였다. 본 편지의 수신자는 남흥수로서 본관은 英陽이며, 자는 穉猶, 호는 濠隱이다. 부친은 南景适, 조부는 南澤萬이다. 김진명의 첫째 아들 金麟洛(1833~1888)이 남흥수의 따님인 英陽南氏(1833~1886)와 혼인하였다.
1차 작성자 : 박경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52년 김진명(金鎭明) 서간(書簡)

情兄 棣座 回納。
臨河 金査弟 謝狀。 謹封。
信後閱月。尋常瞻詠。貴星見到。
惠翰又鄭重。十回愛玩。不覺墨
渝紙毛。恭審花煦
棣床起居淸茂。寶眷均吉。而
婦阿亦安好。種種仰賀。實非虛
語也。査弟。老人筋力。恒在諐攝。已
極煎憫。而渠亦汨沒冗幹。至於尋
數之業。已屬笆籬久矣。浩歎奈何。惟
是稚兒。順行痘疾。長豚姑無恙。但
渠鈍滯。雖不廢課令。而亦不免這
樣。可憫。從君京行。昨已見還。未免㶚
淚。槩其近耗。宜也不足恨也。嶺人未得
多參。而弊鄕僅四人云爾。一晉之計。
連値揶揄。尙此未諧。來敎又未安。尤
切愧汗。方以念間準擬。而未前亦何必
也。海上給牒事。朝論已頓定云。而未蒙
允之前。尙未能準信耳。餘萬。書何能
盡。惟在早晏面晤。以攄無限之好。不宣。
統惟回照。
壬子三月十日。査弟 金鎭明 拜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