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년 9월 14일, 柳致聲이 빈소를 모시는 상대방과 그 가족들의 안부 및 상대방 아들의 방문을 요청하는 편지
1840년 9월 14일, 柳致聲이 빈소를 모시는 상대방과 그 가족들의 안부 및 상대방 아들의 방문을 요청하는 편지이다.
편지는 예식을 생략한다는 말로 시작한다. 지난번에 류치성이 문상하러 가서 여러 날 머물면서 상대방이 사는 곳의 명승지를 구석구석 둘러보니, 60년 마음속의 경영을 펴기에 충분하여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맞아도 옷이 젖는 애석함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류치성은 뜻밖에 상대방이 인편을 통한 편지에서 지난날의 간절한 뜻을 자세히 써주어 여러 번 읽었으나 오히려 미진함이 있었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상대방의 안부를 물었다. 늦은 가을에 빈소를 모시는 상대방의 생활은 신의 보호를 받고 있고, 그 아들은 부모님을 모시면서 학문에 힘쓰고 있으며, 상대방 大小家도 길하고 신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 류치성의 마음에 위안이 되고 아울러 축하드리고 싶다고 했다.
류치성은 해를 거듭할수록 몸이 좋지 않음이 더욱 심해져 쓸모없는 선비임을 깨달았고, 諸從과 孫姪輩는 예전처럼 지내나 근심과 걱정에 쌓여있을 때라고 했다. 선친은 뜻이 맞는 사람과 상대하여 토론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면서 매번 동쪽하늘을 바라보며 친구를 그리워했는데, 류치성 역시 그러한 일을 겪으니 선친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는다고 했다. 지나가는 길에 상대방 아들이 들러주면 좋겠다고 했다. 마을의 노인들의 상황을 일일이 기록하지 못한다는 내용을 마지막에 적었다.
편지에서 ‘雲樹’는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하는 말로, 杜甫의 「春日憶李白」 詩의 "渭北春天樹 江東日暮雲"에서 유래했다. 편지의 수신자는 미상이지만, ‘雲樹’라는 표현과 영해 괴시리 영양 남씨 영감댁에서 이 편지를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양 남씨로 판단했다.
편지의 작성연도는 1840년일 것이다. 1833년(계사년) 1월부터 1835년(을미년) 9월까지의 도산서원 『尋院錄』에 류치성의 방문 기록이 있어 편지의 작성 간지인 경자년을 1840년으로 판단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