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7년 10월 7일, 金熙周가 상대방이 사행을 잘 다녀오길 바라는 내용을 담아 쓴 편지
1817년 10월 7일, 金熙周(1760~1830)가 상대방이 사행을 잘 다녀오길 바라는 내용을 담아 쓴 편지이다.
편지는 인사말이 생략되었다. 상대방의 사행이 곧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언덕과 진펄에서 말을 몰아 달리는 것은 진실로 노년에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지만, 詩 3백편을 외워 사방에서 독단적으로 응대하는 것 역시 장부의 일일 따름이니, 사모하며 부러워할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랑캐의 뜰에서 무릎을 꿇어야 함은 상대방 역시 면할 수 없으니, 춘추의 의리가 없음에 우습다고 했다.
추위가 시작되었는데, 영감의 체후는 손상되지 않았는지 물었다. 김희주는 마음이 어수선하여 말할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鶴麓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었고, 영감은 또 국경을 나가게 되었으니, 곧 서쪽으로 陽關을 바라보면, 어찌 다시 한 명의 친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서글픈 마음을 드러냈다. 다만 사행을 잘 가서 큰일을 잘 치루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편지 본문의 ‘鶴麓’은 李益運(1748~1817)을 일컫는다. 본관은 延安이고, 자는 季受이다. 남인의 영수 채제공의 문인으로 채제공을 두둔하다가 여러 차례 파직된 바 있다. 대사헌·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陽關’은 옛 關名인데, 고인들이 흔히 이곳에서 손을 전송했으므로 이른 말이다. 王維의 「送元二使安西」 詩에, "위성의 아침 비가 가벼운 먼지를 적시니, 객사는 푸르고 푸르러 버들 빛이 새롭구나. 한 잔 술 더 기울이라 그대에게 권한 까닭은, 서쪽으로 양관 나가면 친구가 없기 때문일세.[渭城朝雨浥輕塵 客舍靑靑柳色新 勸君更進一杯酒 西出陽關無故人]"라고 했는데, 편지의 내용은 여기서 빌어 왔다.
발신자 김희주의 본관은 義城, 자는 公穆, 호는 葛川이며, 이상정에게 학문을 배웠다. 1789년(정조 13) 소과에 합격했고,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아 초계문신으로 발탁되었으며, 영해부사·안주목사·병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만년에는 벗들과 함께 향촌사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