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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류범휴(柳範休)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8+KSM-XF.1788.4717-20160630.07142570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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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류범휴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788
형태사항 크기: 21.2 X 34.2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덕 괴시 영양남씨 괴시파 영감댁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788년 류범휴(柳範休) 서간(書簡)
1788년 11월 15일, 류범휴가 고향의 아버지에게 쓴 편지이다. 본인은 직무 가운데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으며, 정조가 영남의 상소를 보고 감탄하여 조덕린황익재을 무죄로 하는 은혜를 내렸다고 전했다. 본인은 관직을 그만두고자 했지만 대신이 아직까지 임금에게 아뢰지 않아 민망하고 박절한 심정도 편지에 썼다.
1차 작성자 : 김명자

상세정보

1788년 11월 15일, 류범휴(柳範休)가 고향의 아버지에게 쓴 편지
1788년 11월 15일, 柳範休(1744∼1823)가 직무 가운데 공부하고 있는 것과 趙德鄰(1658∼1737)황익재의 무죄 소식을 고향의 아버지에게 전하는 편지이다.
연말에 눈이 많이 쌓였는데, 부모님 쪽의 소식이 없으니 천리 밖에서 그립고 근심되는데, 조섭하는 체후는 전날보다 나은지 물었다. 류범휴는 질병 없이 직무를 보고 있으며, 『퇴계집』을 읽고 『중용』·『대학』을 외며 그럭저럭 보내고 있으니 아버지께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다. 이름에 자가 들어간 종은 어느 날 도착하겠으며, 공사채를 거두는 일은 차라리 제기하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 했다.
이어 영남의 상소에 대한 결과를 알려주었다. 영남의 상소가 승정원에서 막혔다가 11월 5일 효창묘에 거동할 때 상언하고, 예조에서 복계했다고 전했다. 정조가 친히 책자를 보고 매우 감탄해서 유생을 불러 보고, 조옥천황종성을 무죄로 판명했으며, 이어 첩서를 발급하여 대후지(大厚紙)에 대서특필하여 전교를 하고, 친히 임하여 유생들을 가르쳤다고 전했다.
류범휴는, "이와 같은 은혜는 영남이 있은 이후로 어찌 다시 있겠습니까? 또 성스러운 군주와 어진 재상이 영남을 추허한 것이 이처럼 두터우니, 진실로 영남 인사가 이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임금의 부탁을 갚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감사에 눈물 흘리며 황공하고 두려운 것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감탄하고 두려운 마음을 표현했다.
마지막에는 임금께 체직을 아뢰고자 했으나 대신이 아직까지 주달하지 않아 민망하고 박절한 심정을 드러냈다. 나머지 내용은 景瞻이 갑자기 돌아간다고 해서 간략하게 쓴다고 했다.
발신자 류범휴의 본관은 全州, 자는 天瑞, 호는 壺谷이다. 조부는 공조참의를 역임한 升鉉이고, 아버지는 道源이다. 李象靖에게 학문을 익혔고, 1780년(정조 4) 문과 급제하여 의금부도사·고성군수·안변부사 등을 지냈다. 저서로 『泮村問答』·『師門簡牘』·『壺谷集』 등이 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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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788년 류범휴(柳範休) 서간(書簡)

【柳壺谷 名範休 字天瑞。】

歲暮雪深
親邊消息漠然。千里慕慮之情。當作
如何。伏不審此際。
調體或勝似於前日否。子。仍無疾病。謹供
職事。又隨分讀退陶書。連誦庸學。粗
以聊遣。無足費慈念也。奴。何日得
抵。而公私債收刷之節。寧不欲伏提耳。
嶺疏。一向阻於喉院。畢竟於今月初
五日孝昌墓動駕時上言。禮曹復
啓。親覽冊子。大加歎賞。引見儒生。
白脫趙玉川黃鍾成。仍給牒書。
傳敎於大厚紙。大書特書。親臨授
儒生。若此恩數。自有嶺南以來。豈
復有之耶。且
聖主賢相之所推許嶺南。如此其隆重。
誠恐嶺土人士。不能堪此責。而效此托
也。感泣惶懼。無以爲言。遞職事。大臣迨
未奏達。閔迫奈何。餘。景瞻忽地告歸。撥忙草草。
不備。伏惟
下鑑。上白是。
戊申十一月望日暮。子 範休 上白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