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8년 11월 25일, 李象靖이 안부를 전하고자 경주 양동의 사돈 李範中에게 보내는 편지
1758년 11월 25일에 李象靖(1711~1781)이 안부를 전하고자 경주 양동의 사돈 李範中(1708~?)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는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데 부모님을 모시는 뒤 끝에 상대방의 조용히 섭양하는 생활은 어떠하며, 촌내도 평안하여 좋지 못한 근심은 없는지 물었다. 며느리가 떠난 후에 다시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어른을 잘 모시며 아무 탈 없는지도 물었으며, 가지가지 그곳으로 향하는 마음 빈 날이 없다고 했다.
이상정은 예전처럼 그럭저럭 지내고 있지만, 마을이 전염병으로 깨끗하지 못하여 사망하는 자가 많다고 했다. 이상정의 집 근처에까지 전염병이 이른 것은 아니지만 아침저녁으로 근심되고 두렵다고 했다. 아이들은 공부하고 있지만 소소한 질병에 많이 걸려서 근심을 놓을 수 없다고도 했다.
이범중의 아들은 모두 서원 齋室에 들어갔는지 물으며, 공부의 소득이 나날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조세 독촉에 관한 일은 이미 결론이 났는지 물었다. 원근의 벗들이 이 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상하게 하지만, 스스로를 걱정할 겨를도 없는 본인이 남을 걱정하고 있으니 그 어리석음에 스스로 웃을 뿐이라고 했다. 伯容 兄[李憲默, 1714~1788]이 西關으로 말을 보러 가는 것은 현명한 자를 대우하는 도리는 아니지만, 복직되어 공명 길로 가는 번거로움 보다는 나은 일이라고 하면서, 그가 길을 떠났는지 물었다. 아울러 이상정이 하인을 보내 근래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는 사실도 전했다.
발신자 이상정의 본관은 韓山, 자는 景文, 호는 大山이다. 아버지는 泰和이며, 어머니는 재령 이씨로 갈암 이현일의 손녀이며, 栽의 딸이다. 1735년(영조 11) 급제한 이후 연원찰방 · 연일현감 등에 제수되었으나 곧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 교육과 학문 연구에 힘썼으며, 18세기 중반 영남학파의 중심인물로 평가받는다. 저서 및 편저로는 『四禮常變通攷』·『約中編』·『退陶書節要』·『理氣彙編』·『敬齋箴集說』·『朱子語節要』·『心經講錄刊補』 등이 있다.
수신자 이범중의 본관은 驪州, 자는 彛卿, 호는 二香亭이다. 회재 이언적의 후손으로, 1741년(영조 17) 소과에 합격했으며, 1746년 齋郞에 제수된 이후 온양수령 등을 역임했다. 말년에는 고향에서 학문에 힘썼으며, 樊巖 蔡濟恭, 대산 이상정 등 당대 ‘慶南’ 및 영남의 대표적인 학자들과 교유했다.
발신자와 수신자는 사돈으로 이상정의 아들 埦과 이범중의 딸이 혼인했으며, 소식이 막힌 지 또 다시 한 달이 되었다는 표현으로 미루어 이들은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학문적인 교류도 활발했는데, 이범중의 아들 李憲愚를 비롯한 양동의 여강 이씨는 이상정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이상정의 아들 완은 이범중에게 배우기도 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