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1874년 남흥수(南興壽) 석전제(釋奠祭)의 헌관(獻官) 임명문서
이 문서는 영해부(寧海府)에 사는 영양남씨(英陽南氏) 문중의 남흥수(南興壽)가 석전제(釋奠祭)의 헌관(獻官)에 차출되면서 받은 임명장이다. ①-(1)1872년에 받은 헌관(獻官) 차정첩(差定帖) 및 ①-(2)차정첩과 함께 영해부(寧海府) 예방(禮房)이 보낸 고목(告目)과 ②-(1)①-(1)1874년에 받은 헌관(獻官) 차정첩(差定帖) 및 ②-(2)차정첩과 함께 영해부 예방이 보낸 고목으로 이루어졌다.
석전제(釋奠祭)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서는 『주례』, 『예기』 등에 기록이 남아 있다. 석전은 산천 또는 묘사에 지내는 제사이기도 하며, 때로는 학교에서 지내기도 했다. 이후 학교에서의 의식으로서만 의미가 고정되었다. 석(釋)은 '놓다'(舍也), '두다'(置也)의 뜻이고, 전(奠)은 '그치다'(停也)의 뜻으로서, '제물을 올릴(薦饌)' 따름이고 '시동을 맞이하는(迎尸)' 등의 제사 절차는 진행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석전은 성균관을 중심으로 봄・가을 두 차례 있었고, 지방에서는 330여의 향교에서 중앙의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매년 두 차례씩 석전을 올렸다.
1872년(고종 9) 7월, 영해도호부에서는 남흥수를 석전제(釋奠祭)의 헌관으로 차임한다는 차정첩(差定帖)을 내렸다. 남흥수는 8월에 지낼 석전제의 헌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영해부 예방 신의순(申義淳)은 남흥수에게 본 읍에서 남흥수에게 8월 석전제의 헌관으로 임명한다는 사실을 명시하는 내용을 수록한 고목을 전달했다.
1874년(고종 11) 1월에도 1872년의 전례가 준용되었다 영해부에서는 남흥수를 다시 석전제의 2월 제사의 헌관으로 차임하면서 차정첩을 내렸다. 이에 예방 신수곤은 남흥수에게 영해부에서 2월 석전제의 헌관으로 임명한다는 사실을 명시하는 고목을 전달했다.
문서 번호 |
자료명 |
발급 |
수취 |
①-1 |
1872년 유학(幼學) 남흥수(南興壽) 헌관(獻官) 차정첩(差定帖) |
영해부 |
남흥수 |
①-2 |
1872년 영해부(寧海府) 예방(禮房) 신의순(申義淳) 고목(告目) |
영해부 예방 |
남흥수 |
②-1 |
1874년 유학(幼學) 남흥수(南興壽) 헌관(獻官) 차정첩(差定帖) |
영해부 |
남흥수 |
②-2 |
1874년 영해부(寧海府) 예방(禮房) 신수곤(申守坤) 고목(告目) |
영해부 예방 |
남흥수 |
※ 참고문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대백과사전』
1차 작성자 : 김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