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4년 노비 기상(記上) 토지의 환급 요청을 위한 소송문서
이 문서는 노비 기상(記上) 토지의 환급 요청을 위한 소송과 관련된 것이다. 문서는 ①1704년 사노(私奴) 옥생(玉生) 소지(所志), ②1704년 화민(化民) 이지형(李之炯) 이재수(李再秀) 소지(所志), ③1694년 노(奴) 옥생(玉生) 기상명문(記上明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기적으로 볼 때 ③번 문서가 가장 이른 시기에 작성되었다. 이것은 1694년 노 옥생이 상전에게 재산을 바치면서 작성한 것이다. 노 옥생은 상전댁의 주사노(主祀奴)인데 가난해서 매년 신공(身貢)을 바치지 못했으며 제위로 마련된 곡식을 많이 받아서 먹었는데도 이를 갚지 못하고 여러 차례 도망갔다. 결국 옥생은 양안(量案)에 자신의 아버지 진산(進山)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 2결 규모의 토지를 상전에게 바쳤다.
①번 문서는 상전에게 전답을 바친 이후 옥생이 영덕현에 토지의 환급을 요청하면서 작성한 것이다. 명문에 기재되었듯이 옥생의 아버지 진산은 영덕현에 투자(投字), 우자(友字), 교자(交字), 장자(杖字) 등 자호의 전답 1결(結) 80여 부(負)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옥생의 아버지와 조부가 사망한 이후 그 토지를 관리하지 못했는데, 그 사이 도천(道千)이란 자가 멋대로 갈아먹자 1683년에 관에서 처결을 받고 추심한 적이 있었다. 이후 남에게 또 토지를 빼앗기게 되자 관에 추심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한 관의 처분은 문서가 결락되어 알 수 없다. 이 문서에 기재된 내용 가운데 1683년에 도천이 토지를 경작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관에 올린 소지와 이로 인해 관으로부터 받은 입안은 전해지지 않는다.
②번 문서는 화민 이지형과 이재수가 영덕현에 올린 소지로 역시 같은 토지의 추심을 관에 요청한 것이다. 이지형과 이재수는 진산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가 갑술양안에 현록되어 있으며, 1683년 그의 아들 옥생이 이 토지를 타인이 경작하고 있음을 알고 관에 고한 이후 추심하여 입안 받은 사실을 언급했다. 옥생에 대해서는 정축년 즈음 나타났다가 무인년에 자식 없이 사망하였다고 하였다. 후손 없이 죽은 노의 전토는 상전이 추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동안 집안에 큰 일이 있어서 하지 못하다가 구립(九立), 정업(丁業), 구산(九山), 승립(承立), 철영(哲永), 업선(業先), 시산(是山) 등이 '황무지를 개간한 것이다.' 혹은 '매입한 것이다.' 라고 하면서 토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알고 위의 사람들을 잡아서 추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관에서는 토지의 소유자가 소지를 올린 자의 소유 노비가 확실하고 타인에게 방매한 문기가 없으면 추급하기 위해 잡아오라는 내용으로 처분을 내려주었다.
기상전답(記上田畓)이라는 용어는 '기록하여 상납한다'는 뜻으로 노비가 자신의 재산을 관청이나 상전에게 바치거나 혹은 노비의 재산을 소속 관청이나 상전이 차지하는 경우에 사용하였다. 이 문서들은 17세기 기상전답의 규모 및 이동과 관련하여 조선시대의 노비가 어느 정도의 사유재산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어떠한 방식을 통해 노비의 재산을 상전이 소유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이지형이 진산 소유의 토지를 소유하기 위해 예로 든 무후노비의 재산은 상전에게 귀속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 것은 『경국대전』 형전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이 문서를 통해 경작하지 않은 땅을 타인이 멋대로 경작하여 다시 추심하는 소송이 빈번하게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황무지, 매입 등의 이유를 들어 타인 소유의 전답을 멋대로 경작하였는데 이러한 소송은 조선시대 빈번하게 발생한 토지소송 가운데 하나였다.
문서 번호 |
자료명 |
발급 |
수취 |
① |
1704년 사노(私奴) 옥생(玉生) 소지(所志) |
옥생 |
영해부 겸관 |
② |
1704년 화민(化民) 이지형(李之炯) 이재수(李再秀) 소지(所志) |
이지형 외 |
영해부 관아 |
③ |
1694년 노(奴) 옥생(玉生) 기상명문(記上明文) |
옥생 |
상전댁 |
1차 작성자 : 조정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