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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병산서원(屛山書院) 통문(通文) 초(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7+KSM-XF.1905.4717-20150630.062526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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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병산서원, 의흥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작성시기 1905
형태사항 크기: 29.1 X 87.2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의인 진성이씨 의인파 은졸재고택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905년 병산서원(屛山書院) 통문(通文) 초(抄)
1905년 1월 18일과 같은 해 2월 16일에 병산서원(屛山書院)에서 의흥향교(義興鄕校)로 보낸 통문(通文) 2건을 베껴 놓은 기록이다. 병산서원에서는 의흥지역에 있는 인각사(麟角寺)와 병암(屛巖)에 건물을 지어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유촌(柳村) 박공(朴公)을 기리려고 하는데, 이를 방해하는 것을 항의하고 있다.
1차 작성자 : 명경일

상세정보

1905년에 屛山書院에서 義興鄕校로 보낸 通文 2건을 베껴 놓은 기록
1905년 1월 18일과 같은 해 2월 16일에 屛山書院에서 義興鄕校로 보낸 通文 2건을 베껴 놓은 기록이다. 義興은 지금의 군위군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麟角寺와 屛巖이 있었다. 안동의 병산서원에서는 이곳이 旅軒 張顯光(1554~1637), 西厓 柳成龍(1542~1607), 柳村 朴公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므로, 이들을 기리는 장소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의흥 지역의 누군가가 이를 방해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기릴 만한 특정한 장소가 있지 않고 본인들이 평소에 유람하고 시를 읊는 곳이라는 이유였다. 이 때문에 경상감영에서 소송을 벌이는 일까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병산서원에서 보낸 통문에서는 이런 행위를 그 장소를 자기만의 물건으로 삼으려는 것인가 하고 반문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 ‘第棟’을 만들면 士氣가 진작되어, 의흥지역의 表準이 되고 영남 지역의 聳動하는 바가 될 것인데, 이를 막는 것은 곧 선현을 배신하고 尊大를 망령되게 하는 것이라고 질책하고 있다. 그리고 2월 16일 통문에서는 말하길, 다음 달 17일에 의흥에 가서 여러분들에게 이를 막는 곡절을 물어볼 것이라고 하고 있다.
1차 작성자 : 명경일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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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병산서원(屛山書院) 통문(通文) 초(抄)

屛山再度通文。
右文爲回諭事。伏以。妄尊大而不知尊賢之爲何事。任倔强而不識自
强之爲何義。則是自悅於山蹊之間。而永棄於儒紳之列矣。仰惟貴
鄕麟角屛巖。卽西厓柳先生。旅軒張先生杖屨播馥之地。而柳村
先生朴公之陪遊題詠之所也。雖無一屋子。表章之揭扁之已有鄕
道內儒錄稧帖。則何可曰無其所而羹墻。於是寤寐。於是不日。第
棟居然而成。則士氣由是而有振作之望。鄕隣由是而有觀聽之
美。樂放縱者。日就乎繩檢。喜頑率者。自納於規範。非徒爲貴
鄕之所表準。亦一省之所聳動耶。意自貴鄕同室之內。忽生沮格
之意。反致戱事之患。是豈意慮之或及哉。如是。則向日之與隣鄕
人相訟營庭者。果何意也。其曰。我有遊覽。我有題詠云。則其將
以掠取先賢留賞之蹟。以爲自己之私物耶。一登覽。一題詠。夫人之
所可能。則登覽之人擧皆爲己物耶。先賢未償之債。後人踵而
成之。以爲傳美於後日。所重於當時者。豈無其人。而彼朴也之任自
倔强。妄自尊大。背先賢。而甘自棄沮衆論。而立私見。睥睨先賢
留賞之地。沮却一鄕已定之論。則其將謂擧皆無人而然耶。竊惟。
以貴鄕多士尊慕之誠。一任朴也之低仰竟致尾大之患者。將誰
任其咎也。然此係吾林。大議論大氣數。雖貴鄕無言鄙等不敢無
言。鄙等無言。一省豈無起而正之之人耶。玆略仰溷于僉君子。惟
僉尊諒察焉。
右通答。
義興鄕校。 乙巳正月十八日。屛山書院。
院長。前郡守。李晩胤。有司。幼學。尹大鉉柳東郁。會員。幼學。柳致榮。前郡守。柳道獻。進士。柳道弼柳道龜。幼學。金溶根
安明烈柳喜榮金秉璜李廷佐柳聞榮宋德祖李宅鍾。前參奉。柳永佑
幼學。柳道馨權準國柳道國李亨魯柳漢佑權永祚柳千植南錫禧
金祖洙柳德榮柳源植柳泰榮。等。

屛山三度通文。
右文爲通告事。鄙等。以麟角修稧事。已定期日。方擬趁期齊赴矣。
近聞自何來之言。謂以麟角是圃隱鄭先生入案地。雖無文字之
往復。而旣有是言。則不能無使人眩惑。此所修稧之論。非始出於今日。則
何不於前冬兩度通諭之日曾爲之言。而今乃言之。何也。豈向來
戱事之人。悶其計之不售。末乃借援於鄕隣。姑爲是藉重而然耶。
謂人莫敢議到而然耶。麟角卽龜山之一寺刹耳。果如是說之爲
入案地。麟角與屛巖自是不同。則麟角自麟角。屛巖自屛
巖。何嫌於吾輩修稧之地乎。今日之言。旣以臨皐爲重。而果有
所未安於厓旅柳三先生。則鄙等亦粗知尊賢之道矣。豈可
以他人之有言容易遽破垂成之大論乎。貴鄕之人。雖未知其
誰某同聲。而人見本不相殊。公議自有所在。則必不與他相
合以爲沮敗之計也。鄙等方以來月十七日。同赴貴鄕。以訪玆
事前後曲折之如何。兼聽僉君子之緖論矣。惟僉尊諒察。
幸甚。
右通文。
義興鄕校。乙巳二月十六日。屛山書院。院長。前郡守。李晩胤。齋任。幼學。尹大鉉柳東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