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광무 7) 1월 28일에 金翼洛이 喪事에 대해 위문하고 근황을 전해 주기 위해 李中錫(1854~1912)에게 보낸 편지
1903년(광무 7) 1월 28일에 金翼洛이 喪事에 대해 위문하고 근황을 전해 주기 위해 李中錫(1854~1912)에게 보낸 편지이다.
金翼洛은 본관이 義城으로, 愚軒 金養鎭의 아들이다. 李中錫은 李秉淳의 曾孫인데, 바로 金養鎭의 딸인 義城金氏와 혼인하였다. 따라서 金翼洛과 李中錫은 서로 처남매부지간이다.
먼저, 근래 李中錫이 당한 일이 어떠한데 자신이 아직까지 편지도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인정에 어긋난 행동이었다고 하였다. 늘 편지하려고 붓을 들 때마다 눈물이 앞서 위로드릴 말이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스스로 非情한 죄과를 지고 말지언정 차마 꺼낼 수 없는 말을 붓으로 적어 재가 된 마음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지금까지도 위문편지를 지체하게 되었다며 양해를 구하였다. 일찍이 이런 變故를 겪었던 자신의 정으로 보건대, 李中錫은 혹 이해해 줄 수 있어도 감히 스스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어 服中에 있는 李中錫과 누님의 안부를 묻고, 禍難으로 인해 정신이 꺾이거나 志氣가 상하게 하지 말고 애통한 심정을 억제하고 참아서 志慮를 부지하고 굳건히 하여 평소와 다름없이 집안일을 보고 공부한다면 어찌 앞으로 좋은 때가 없겠느냐고 하였다. 返櫬 등의 일은 어떻게 하며 葬禮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물었다. 金翼洛 자신은 뜻하지 않게 얻은 腫苦가 몇 달 동안이나 낫지 않다가 지금에는 거의 완치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마음대로 걸을 수 없다고 하였다. 병든 집사람도 매우 위중하여 날마다 湯劑를 끓이는 데 골몰되어 있는 등 문밖의 일에 대해 돌볼 겨를이 없다고 하였다. 늙으신 어머니께서 겨우 병이 악화되지 않았을 따름이라고 하였다. 明火賊이 일전에 川上에서 3인을 掘埋하고 어제는 또 몇 명을 捕捉했다고 하면서, 두려운 마음을 전하였다. 추신에서는, 榮川에서 보내온 위문편지를 여름에 李中錫의 문서 상자에 깜빡 잊고 두고 왔다고 하면서 이번 편에 모두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다.
李中錫(1854~1912)은 본관이 眞城, 자가 圭範이다. 그는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인 李秉淳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陶山書院의 院任을 지냈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