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광무 5) 11월 7일에 金翼洛이 陶山書院 尙德祠에서 벌어진 廟變 등과 관련하여 李中錫(1854~1912)에게 보낸 편지
1901년(광무 5) 11월 7일에 金翼洛이 陶山書院 尙德祠에서 벌어진 廟變 등과 관련하여 李中錫(1854~1912)에게 보낸 편지이다.
金翼洛은 본관이 義城으로, 愚軒 金養鎭의 아들이다. 李中錫은 李秉淳의 曾孫인데, 바로 金養鎭의 딸인 義城金氏와 혼인하였다. 따라서 金翼洛과 李中錫은 서로 처남매부지간이다.
먼저, 근래의 사건에 대해 통곡만 할 밖에 달리 무슨 말을 하겠느냐고 하였다. 또 천하 만세에 어찌 이렇게 지극한 변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金翼洛 자신은 소식을 들은 날에 즉시 달려가 봤어야 했으나 상복차림으로 가기가 어려웠다고 하면서 매우 죄송하다고 하였다. 三堂이 구속되는 등의 일은 마음에 둘 필요가 없으나 李中錫이 노쇠해져가는 기력으로 사태를 감당하기 어려울 듯 하므로 매우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道會의 일자가 이달 10일로 정해졌는데 향후 절차를 어떻게 조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였으며, 監營에 呈訴하고 上京하여 호소하는 儒生들이 이미 출발했을 줄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이 편지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는 변괴란 이달 1일에 벌어진 陶山書院 廟變을 가리킨다. 이는 尙德祠에 모셔져 있던 退溪 先生의 位版이 도난당한 사건으로, 『陶山書院廟變時日記』에 그 자세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日記에 따르면, 이 시기에 李中錫은 陶山書院의 齋任을 맡고 있었다. 三堂은 書院의 三任을 일컫는 말로 보이는데, 日記에 따르면 이달 3일에 禮安 수령이 禮吏를 보내어 책임을 물어 三任을 압송해 오게 하였으며 書院 측에서 다음날 모임의 논의 결과를 보고자 하였으나 三任이 자발적으로 출두하였다. 金翼洛은 이어 자신의 병세, 병든 어버이 봉양, 병으로 거의 죽게 된 아내 등에 대해 언급하면서, 날마다 애를 태울 따름이라고 하였다. 끝으로, 이미 정한 혼인 날짜가 저절로 어그러지게 된 것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李中錫(1854~1912)은 본관이 眞城, 자가 圭範이다. 그는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인 李秉淳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陶山書院의 院任을 지냈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