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광무 5) 4월 11일에 李中鉉이 안부를 교환하고 『壬子錄』 간행 경과에 대해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
1901년(광무 5) 4월 11일에 李中鉉(1847~1912)이 안부를 교환하고 『壬子錄』 간행 경과에 대해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李中鉉이 자신을 査下生이라 칭한 것으로 보아, 수신자는 사돈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편지에서 湖上 운운한 것으로 보아 수신자는 全州柳氏 인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사위 柳敦熙의 조부인 柳淵愚인 것으로 보인다. 李中鉉은 본관이 眞城, 자가 台仲으로, 東屛 李彙正의 아들인 李晩耆의 양자이다.
먼저, 상대가 서쪽으로 간 뒤로 거의 3년이 되도록 편지하지 못한 데 대해 죄송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였다. 더구나 상대가 편지를 먼저 보내준 것에 대해 위축되어 편치가 못하다고 하였다. 편지를 읽고 초여름에 객지에서 지내는 상대가 평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참으로 자신이 바라던 마음과 부합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몇 해 동안이나 객지에서 지내는 데에 대책이 없는 것이 어찌 상대가 편지에서 언급한 바와 같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상대가 수령으로 제수되기를 오랫동안 기원하였으나 公論이 미치지 않으니 어찌하겠느냐고 하였다. 상대 집안이 선대의 諡號를 청하는 논의는 朝野가 이견이 없는 듯하니 조만간 이뤄질 것이라고 하였으며, 焚黃이 지금까지 지연되어 延諡한 뒤를 기다려 아울러 거행하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李中鉉 자신은 허약한 체질이 늙기도 전에 먼저 쇠하였고 또 장남이 건강하지 못하게 지낸 것이 지금까지 3년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隣 兒가 공부는 하지 않고 너무 심하게 놀고 있으니 결국에는 지 애비 꼴이 되고 말 것이라고 하였다. 며느리는 다행히 별탈은 없으나 沙谷의 환후가 계속되어 늘 歸覲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湖上의 服制는 뜻밖의 일인데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웠던 상대가 멀리서 소식을 들었으니 그 얼마나 애통하겠느냐고 위로하였다.
추신에서는, 『壬子錄』을 開刊하는 일은 귀 書院에서 통문을 발송하여 安東에서 모여 벌써 爬錄을 정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중론자가 있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한편, 이 편지의 뒷면에는 祭文 1편이 베껴져 있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