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광무 5) 11월 26일 밤에 金奎一이 도산서원 일과 관련하여 李中錫(1854~1912)에게 보낸 편지
1901년(광무 5) 11월 26일 밤에 金奎一이 도산서원 일과 관련하여 李中錫(1854~1912)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에 陶山書院의 廟變에 관한 언급이 보이는데, 廟變이란 이해에 발생한 尙德祠의 退溪 先生 位牌 도난 사건을 가리킨다. 李中錫은 이 당시에 院任을 맡고 있었다. 『陶山書院廟變時日記』에 따르면, 이달 3일에 禮安 수령이 禮吏를 보내 책임을 물어 三任을 압송해 오게 하니 書院 측에서 다음날 모임의 논의 결과를 보고자 하였으나 三任이 자발적으로 출두한 바 있다. 천하의 事變이 끝없이 일어나지만 이러한 유래 없는 사변이 陶山書院의 退溪 사당에서 벌어졌으니, 本孫의 애통한 심경이 어떠하겠으며 士林의 놀라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정도라고 하였다. 그런데 李中錫이 마침 院任을 맡아서 尊奉하는 데 삼가지 않은 죄를 自引하여 獄에 갇힌 지 벌써 한 달이 되어 가고 있다고 하였다. 이번의 事變은 오로지 斯文의 厄會에서 기인한 것인데, 李中錫의 운수는 어쩜 이리도 기구하냐고 하였다. 眞犯이 아직 잡히지 않았으나 어찌 뒷날 雪冤할 기회가 없겠느냐고 하였다. 位牌를 다시 만들어 奉安하는 일은 더없이 시급한 것인데 事變을 당한 뒤에 어찌 급히 儒生을 관련 기관에 보내지 않았느냐고 하였다. 이번에 三任이 언 길을 멀리 여행하여 여러 날이 지난 뒤에 監營獄에 들어가게 된 것은 형편상 당연한 것이라고 하였고, 妥安하는 절차는 禮安 수령이 거행하게 되었지만 致侑는 朝廷에 관련 謄錄이 없기 때문에 임금이 윤허하지 않은 데 대해 크게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였다. 이어 李中錫이 추운 날씨에 무사히 도착하였는지 묻고, 다른 院任인 遠村의 李 丈과 浮浦의 琴 兄도 모두 병이 나지 않았는지 안부를 물었다.
李中錫(1854~1912)은 본관이 眞城, 자가 圭範이다. 그는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인 李秉淳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陶山書院의 院任을 지냈다.
1차 작성자 : 김장경